허정무(55)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진돗개'라는 별명처럼 선수 시절 끈기와 투지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지도자의 길을 걸으면서는 여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왔다.
그는 지금은 대표팀 주장으로 성장했지만, 당시 무명이었던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처음 태극마크를 달게 해 주는 등 학연과 지연을 배격하고 실력에 따라 선수들을 찾아내 기용했다.
결국 허 감독은 지난 12일(이하 한국시간) 대회 조별리그 1차전에서 그리스를 꺾으며 한국인으로는 월드컵 본선 첫 승 사령탑이 됐다.
허 감독은 남아공 월드컵 최종엔트리 23명을 확정할 때 아시아 지역예선 10경기에 출전해 3골을 넣으며 본선 진출에 큰 힘을 보탠 이근호(이와타)를 제외됐다.
허 감독은 또 그리스와 1차전에서는 베테랑 골키퍼 이운재(수원) 대신 정성룡(성남)을 골문 앞에 세웠다. 물론 정성룡이 최근 빼어난 경기력으로 무섭게 치고 올라와 그리스와 대결 며칠 전부터는 훈련에서도 주전 팀의 골문을 지켜 어느 정도 허 감독의 마음은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월드컵 본선 첫 경기라는 중대한 자리에서 통산 네 번째 월드컵에 참가하는 이운재의 경험을 저버리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허정무 감독은 17일 오후 8시30분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열릴 아르헨티나와 2차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줬다.
허 감독은 그리스와 경기가 끝나고 나서 "아르헨티나와 경기는 마음껏 즐겨라. 나이지리아와 3차전에 집중하자"고 주문했다.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와 맞대결에서 결과에 매달리지 말고 그리스와 경기에서 보여준 우리 대표팀만의 플레이를 보여주자는 이야기다.
물론 16강 진출 여부는 나이지리아와 3차전에서 판가름나리라는 현실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부사 허 감독이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포기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허 감독에게서는 선수들이 부담을 털고 제 기량만 보여준다면 아르헨티나도 넘지 못할 산은 아니라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허 감독은 월드컵 본선을 준비해오면서 자신이 선수로 뛰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야기를 종종 꺼냈다. 한국축구로서는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밟은 월드컵 본선 무대였다. 그때도 아르헨티나와 격돌했는데 선수들이 너무 주눅이 들어 제 기량을 펼쳐보이지 못하고 1-3으로 완패했다.
허 감독은 '그때 우리 실력만 제대로 보여줬더라면..' 하고 아쉬움을 드러내 왔다.
24년이 흐른 지금, 제자들은 선배들의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허 감독의 마음이다. "즐기라"는 그의 말에는 지금까지 준비해 온 것만 그라운드에서 풀어낸다면 아르헨티나와 대결에서도 `유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