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앤인물] “비상계엄 사태 뒤 경제 진단, 단어 하나까지 고심…정치 아닌 경제만 생각했다”

한은,비상계엄 사태 후 12일만에 ‘금융·경제 영향 평가 및 대응방향’ 보고서 내
통방부서 통화정책국·금융시장국·국제국·조사국 참여
보고서 제목부터 본문 단어 수정 거듭해…“경제적인 것만 생각”

“‘여·야·정 합의’라는 표현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런 표현을 쓰지 않고 우리의 의견을 전달하는 건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가 아닌 지극히 경제적인 것만 생각했습니다.”

▲김병국 한국은행 통화정책국 팀장이 1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이투데이DB)
작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 경제는 깊은 혼란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팽팽하게 당겨졌던 긴장감의 끈이 한순간에 끊어졌고, 정치·사회 갈등은 격화됐다. 경제의 나침반은 방향을 잃고 공회전을 거듭했다.

경제 주체들의 혼란이 커지던 가운데, 한국은행은 12일 만에 ‘비상계엄 이후 금융·경제 영향 평가 및 대응방향’ 보고서를 내놓았다. 총 15장 분량의 이 보고서에는 과거 두 차례 대통령 탄핵 당시와 이번 사태의 경제적 차이를 분석하고, 앞으로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담겼다. 핵심 메시지는 ‘경제는 정치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병국 한국은행 통화정책국 정책총괄팀 팀장은 이달 11일 서울 소공동 한은 본관에서 진행된 이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분이 그랬듯이, 당시에는 평소보다 훨씬 긴장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특히 그는 비상계엄 직후 발표한 경제 진단 보고서에 대해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해당 보고서는 통화정책 방향과 관련된 부서, 이른바 ‘통방 부서’가 모두 참여해 작성한 것이다. 참여 부서는 통화정책국, 금융시장국, 국제국, 조사국 등 네 곳이다.

김 팀장은 “그런 경제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정책적 대응을 해야 하는지는 주로 통화정책국이 고민하지만, 경제 동향을 파악하고 평가하는 데 있어서 실물 경제는 조사국, 금융시장은 금융시장국, 외환은 국제국이 각각 제 역할을 해 주었다”며 “각 부서가 과거 사례와 함께 분석한 자료를 종합해 보고서를 완성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를 계엄사태 발생 보름도 되지 않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비상대응 태스크포스(TF) 등을 통해 그동안 경제 상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대외 신인도에 대한 우려가 상당히 컸고,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중앙은행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데 내부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며 “자료를 외부에 공개하면 시장의 불안 심리를 완화하거나 대외 신인도 관리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보도자료를 내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를 외부에 공개하기로 결정한 이후의 작성 과정은 고심의 연속이었다. ‘비상계엄’, ‘추경(추가경정예산)’, ‘여·야·정 합의’ 등 이전에는 한국은행 보고서에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던 표현들을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창용 총재를 포함한 주요 임원들의 의견을 반영하며 수차례 수정이 이어졌다.

김 팀장은 “이런 성격의 보고서를 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코멘트를 많이 받았다”며 “저희 입장에서는 이 보고서는 정치적인 게 아니고 지극히 경제적인 이슈인 것이고 경제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걸 보여주자는 측면에서 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을 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단어 선택에도 신중을 기했다. 보고서 제목에 ‘비상계엄’이란 단어를 선택한 과정 역시 치열했다. 김 팀장은 “추경, ‘여·야·정 합의’ 등 평소에 안 쓰던 단어들이 굉장히 많았다”며 “한은은 정치적으로 독립된 기관인데 이런 단어를 쓰면 괜한 오해를 받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그런 표현을 쓰지 않고서 한은의 의견을 전달하는 건 쉽지 않겠다는 견해가 있었다”면서 “단어 선택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동안 잘 안 쓰던 용어들을 많이 써야 되는 보고서였기 때문에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특수한 내용을 담아야 했던 보고서였지만, 긴 시간의 고민과 내부 논의를 거쳐 결국 세상에 나오게 된 배경에는 하나의 공감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정치·경제의 혼란 속에서도 현재 경제 상황을 냉정히 진단하고 방향을 제시할 나침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법 제3조에 명시된 ‘중립성’의 가치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김 팀장은 “해외에서 우리나라 경제를 바라보는 우려의 시선이 많았고, 그만큼 대외신인도 측면에서 ‘우리 경제시스템이 강건하다,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라는 걸 보여줄 필요가 컸다”며 “해외투자자들도 정부에 문의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되짚었다. 그러면서 “그런 상황에서 경제 진단 보고서가 정말 필요하겠다는 공감대 하에 진행됐던 것 같다”며 “당시에는 솔직히 정신은 없었다”며 소회를 전했다.

김 팀장은 보고서에 담은 ‘경제시스템의 독립성’이란 원칙이 경제주체들에게 어느정도 신뢰를 줬는지 묻는 말에 “확인할 수는 없다”고 얘기하면서도 우리 경제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됐기를 바란다고 했다.

김 팀장은 “보고서가 진짜 효과가 있었나 없었나를 알 수는 없겠지만 희망컨대 그래도 한 나라 경제 정책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중앙은행이 ‘경제시스템을 독립적이고 정상적으로 운영해야 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라고 얘기를 계속 했기 때문에 시장이 크게 출렁이는 건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도 정치 불확실성으로 시장이 요동을 치긴 했지만 평상시와 다름없이 정상적으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는 데 (보고서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바람 겸 추측 겸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제주체들 ‘신뢰’ 있으면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아”

▲김병국 한국은행 통화정책국 팀장이 11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이투데이DB)
김 팀장은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진 상황에서 중앙은행을 향한 경제주체들의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팀장은 “한은은 통화정책을 하고, 정부에서는 재정정책을 펼친다 하더라도 이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기본적으로 경제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어야 하고, 그 경제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유지돼야 한다”며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어떤 정책을 펴도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고 짚었다.

이어 “시스템 하에서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시장에서 활동하는 일반 시민들, 즉 경제 주체들”이라며 “정부와 한국은행뿐만 아니라 일반 경제 주체들도 ‘경제시스템에 대한 신뢰’ 유지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경제라는 것이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 속성이 있어서 일반 경제주체들이 불안감과 공포심을 가지게 되면 그것이 경제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것일지라도 경제는 위기에 빠질 수 있다”면서 “비상계엄과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경제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정상적 경제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시민 경제주체들이 경제 정책 당국에 대한 믿음을 가져주시고,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하더라도 그 믿음을 유지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아울러 김 팀장은 “한은도 국민의 그러한 믿음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 나갈 것”이라며 “그러한 신뢰 위에 세워진 경제시스템은 뿌리가 깊어 결코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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