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동 산업연구원 글로벌경쟁전략연구단 단장
韓 외환주권·경제안정 확보가 과제
정교한 대응으로 ‘정책자율’ 지켜야

4월 24일 열린 한미 고위급 통상협의에서 미국이 환율 문제를 별도 의제로 제기했다. 이는 단순한 외환시장 이슈를 넘어, 향후 통상정책 전반에 영향을 미칠 중대한 흐름의 전조로 받아들여야 한다. 특히 미국이 통화정책을 무역 협상의 지렛대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해진 만큼, 우리 정부는 원칙과 실리를 모두 고려한 정교한 대응 전략이 요구된다.
우선 미국의 문제 제기 배경은 명확하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무역적자 축소와 제조업 부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원화 가치가 크게 하락하자, 미국은 이를 환율 조작을 통한 수출 경쟁력 강화 시도로 간주하고 있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환율 조작을 대표적인 비관세 장벽으로 규정한 바 있다. 결국 미국은 환율을 통상 현안으로 끌어올려 원화 절상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자국 산업을 보호하려는 전략이다.
미국이 한국에 요구할 가능성이 큰 조치들은 예상할 수 있다. 첫째, 외환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라는 것이다. 둘째, 환율 운용 과정의 투명성을 강화하라는 요구다. 셋째, 원화 가치가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절상되도록 유도하라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의 지속적인 대미 무역흑자와 경상수지 흑자를 근거로, 원화 강세 요구가 정당하다는 입장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미국은 일본과 중국에도 유사한 방식으로 환율 압력을 행사한 바 있다. 19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엔화가 급격히 절상되었고, 이는 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지는 계기가 되었다. 2019년에는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며 국제무대에서 공개적으로 압박했다. 한국은 2016년 이후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지정되며 지속적인 감시를 받고 있으며, 당시 원화는 1년간 약 13% 절상되기도 했다.
미국이 환율을 통상협상의 주요 의제로 삼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단기적으로는 통상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중장기적으로는 무역수지 개선과 제조업 부활 목적이 깔려 있다. 또한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국가를 견제하는 명분을 축적하고, 동맹국들까지 환율 관리 프레임에 편입시키려는 포석도 엿보인다. 여기에 ‘강한 미국’을 과시해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까지 더해진다. 즉, 미국이 제기한 환율 문제는 경제뿐 아니라 정치·외교·통상 전략이 결합된 다차원적 사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두 가지 원칙으로 대응해야 한다. 첫째, 환율은 시장에서 결정된다는 점을 일관되게 고수하고, 외환시장 개입은 급격한 쏠림 현상에 한정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미국이 요구하는 투명성 강화 등 합리적 범위 내 조치는 수용하되, 정책의 자율성과 시장 안정성은 결코 훼손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대응은 한국의 환율 정책에 대한 국제적 신뢰를 구축하게 하고, 미국의 압박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통화정책 역시 같은 맥락에서 조율되어야 한다. 금리 조정 시에는 한미 금리 격차와 자본 유출입, 환율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특히 원화 약세가 심화되면 통화완화 속도를 조절해 환율안정에 기여할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는 내수 확대, 서비스 산업 육성 등을 통해 한국 경제의 높은 대외의존도를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 이는 환율뿐 아니라 전체적인 통상 리스크를 줄이는 데도 효과적이다.
이번 협상은 단기적인 통화 문제가 아니라 통상정책의 판이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정부는 이번 환율 논의를 건설적이고 기술적인 실무 협의로 발전시켜야 한다. 환율 문제를 위기가 아닌 관리 가능한 정책 이슈로 전환하고, 투명성과 원칙을 바탕으로 외환주권과 대외신인도, 경제안정을 동시에 확보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