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우문현답] ‘좋은 엄마·아빠’ 분투기

이화여대 명예교수ㆍ사회학

입으론 다들 학벌주의 비판하면서
현실은 ‘내자식 최고’ 경쟁 내몰아
자녀행복 배려하는 교육 많아지길

한때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사람들의 모임’이 결성되었다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곤 안타깝게도 흐지부지된 일이 있었다. 누구든 한번쯤은 좋은 엄마·아빠 되기를 꿈꾸지만, 정작 좋은 엄마·아빠 되기가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닌 듯하다.

지금 군 복무 중인 녀석이 어린이집 다니던 시절이니 20년쯤 묵은 이야기다. 그때도 지금처럼 좋은 엄마가 되고픈 마음이 간절했던 초보엄마들이 모여 ‘엄마의 북클럽’을 만들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함께 읽은 책의 소감도 나누고 아이 키우기의 고충도 공유하기로 했다. 책도 추천해주고 젊은 엄마들의 생생한 목소리도 들을 겸, 나도 참여관찰자(?)로 그 자리에 함께 했다.

당시 젊은 엄마들과 함께 읽은 책 중에 1996년 출판된 강준만 교수의 ‘서울대의 나라’가 있었다. 이 책은 서울대 출신이 한국사회 각 분야에서 요직을 점하며 막강한 파워를 행사하고 있음을 신랄하고 통렬하게 비판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북한만 해도 김일성 종합대학과 김책 공과대학이 경쟁관계에 있는데, 우리의 서울대 일극(一極) 독점체제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책을 읽고 초보 엄마들이 서울대 중심 학벌주의의 고질적 폐해에 적극 공감하고 이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볼 것을 기대했는데, 정작 엄마들 반응은 뜻밖이었다. “책을 읽고 나니 우리 아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대 보내야겠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확실히 알았다. 우리네 학벌주의를 비판하고 사교육 광풍을 비난하는 것은 그저 무늬만의 립서비스일 뿐임을. 오히려 평범한 엄마들 마음속에는 ‘우리 아이만 경쟁에서 뒤처지는 건 아닌지’ 막연한 불안과 ‘이러다 우리 아이 인서울 대학 근처에도 못 가겠다’는 근거없는 공포가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그런 만큼 지금도 의대 진학을 위한 7세 고시반이 있다느니, 영어유치원에 들어가려면 4세부터 학원에 보내야 한다느니 하는 뉴스가 젊은 엄마들을 얼마나 불안하고 공포스럽게 할지 눈에 선하다.

하지만 30년 이상을 이런저런 자리에서 젊은 엄마들을 만나온 입장에선 의외로 용기있고 지혜로운 선택을 했던 보통 엄마들의 고군분투 경험담이 차고 넘친다. 강남의 아파트 단지를 떠나 강북의 단독주택으로 옮긴 엄마가 있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 즐겼던 골목의 재미를 아이에게도 경험하도록 해주고 싶어서 용기를 냈다고 했다. 오히려 친정엄마가 자신의 강북행을 못마땅해 하시며 아이 책상 하나 없다고 타박하셨지만, “아이들이 언제 책상에서 공부하는 것 보셨느냐?”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든 식탁에 앉아 책을 읽든 아이가 있는 모든 공간이 공부방이라고” 친정엄마를 달랬다고 했다. 골목을 사랑했던 엄마는 아이 셋을 나았고 남편도 아이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다니던 직장을 나와 아이를 더 재미나게 키우기 위한 사업을 창업했노라 했다.

첫 아이가 두 돌 지났을 즈음 불현듯 개미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한 일상을 반복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세계일주 여행에 나선 제자부부도 있었다. 진정 좋은 엄마·아빠가 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부모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할 것 같아서 만용을 부렸다고 했다. 가진 돈 탈탈 털어 세계일주 여행을 떠났는데 이탈리아 시골 마을에서 한 달살이 하는 동안 둘째가 생겨 네 식구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다. 당장은 직장도 불안정하고 돈도 없지만, 아이는 돈만으로 키우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다지 걱정은 안한다며 환하게 웃기까지 했다.

지금 살고 있는 세종시 조치원읍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젊은 엄마, 두 아들이 초등학교 시절만이라도 마음껏 뛰어 놀게 해주고 싶어 조치원 인근의 전의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했다. 처음엔 자신의 결정에 자신도 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주말에도 학교 가고 싶다며 조르는 두 아들을 보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했다.

이젠 4세 고시, 7세 고시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면서 괜시리 예비 학부모의 불안과 공포를 부추기기보다, 이미 숨 막힐 것 같은 교육제도 안에서도 소중한 자녀를 위해 숨 쉴 공간을 마련해주느라 애쓰는 평범한 부모들의 비범한 이야기를 널리 알리는 것이 보다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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