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칼럼] ‘의회독재’ 길 터준 87체제의 비극적 後果

입력 2025-01-1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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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ㆍ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무소불위 국회 '다수의 폭정' 불러와
무너진 법치…기업 투자계획도 미뤄
활력 잃은 경제 '저성장 악순환' 빠져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1835)는 정치학의 고전이다. 그는 미국의 정치제도 및 현실을 보면서 민주주의의 잠재적 위험요인으로 ‘다수의 폭정’(tyranny of majority)을 지목했다. 이는 ‘의회독재’를 의미한다. 의회독재는 전제정치 또는 귀족정치에서 나타나는 권력 집중과는 다른 형태의 억압으로 다수 정파의 의견이 ‘절대선’으로 간주되는 후진적 정치행태를 의미한다.

1987년은 대한민국의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규정하는 중요한 시기로, ‘87체제’는 19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주의적 질서를 확립한 헌정 체제를 의미한다. 하지만 87체제는 ‘의회권력의 비정상적 비대화’라는 역작용을 낳았다. 토크빌이 그토록 경계한 ‘다수의 폭정’의 씨가 한국에 뿌려졌고, 그것이 발아한 것이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다. 입법부의 이상 권력 비대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권력의 분립과 균형’을 위협한다. 대한민국에서 삼권분립은 사치스런 단어가 됐다.

한 가지만 짚는다. 한덕수 권한대행의 탄핵소추 정족수를 “200인으로 할 것인가, 150인으로 할 것인가”를 정한 것은 국회의장, 즉 원내 다수당 대표였다. 헌법 정신과 탄핵 해설서에 충실하면, 3분의 2인 200인이 맞다. 150인 기준은 그 자체가 독선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은 용이해도 대통령의 국회해산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현금의 대한민국만큼 국회 다수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선진국은 이 지구상에는 드물다. 대한민국은 이미 ‘노동과 국회’로 기운 운동장이 돼 버렸다.

국회로 기운 운동장은 경제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 것인가? 경제의 울타리는 정치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모든 경제활동은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내에서 이뤄진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배’(majority law)를 기준으로 돌아간다. 다수의 지배는 ‘다수결’로 압축된다. 하지만 민주주의 원칙은 다수의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 즉 ‘법치주의’(rule of law)이다.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문제의 대부분은 ‘다수의 지배’와 ‘법의 지배’가 충돌하기 때문이다. ‘다수의 힘’은 절대선으로 군림한다. 그러니 경제정책도 다수의 지지를 얻기 쉬운 ‘포퓰리즘’으로 경도되는 것이다.

정부는 올해 경제성장률을 잠재성장률 수준에 못 미치는 1.8%로 전망했다.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 3.2%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정부가 제시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 1.8%도 위태롭다. 글로벌 투자은행인 미국 JP모건은 한 달 사이에 전망치를 1.7%에서 1.3%로 낮췄고, 씨티그룹도 1.6%에서 1.5%로 내렸다. 한국 경제는 총체적 위기상황에 놓여있다. 작년 8.2% 증가해 사상 최대였던 수출 성장세도 트럼프 리스크로 크게 둔화될 전망이다. 원화 약세로 인한 수입물가 상승 등으로 민간 소비 역시 1%대의 낮은 성장이 예상된다. 수출과 내수가 위축되면서 일자리 증가 폭도 작년보다 5만 명 적은 12만 명에 그쳤다.

경제는 화초와 같다. 뿌리가 마르면 화초는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건 그나마 여력이 있는 대기업의 투자 확대뿐이다. 하지만 국내 설비투자 규모는 작년 10∼11월 두 달 연속 감소했고, 폭증한 국내외 불확실성 탓에 주요 기업들마저 투자계획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K칩스법 등 투자 촉진 법안들도 ‘반도체 근로자 주 52시간 예외적용 반대’에 막혀 공전하고 있다. ‘노동시간 규제는 어떤 예외도 존재하지 않는 불가역적 정책’이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어서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이재명의 ‘민생경제 회복 지원금 일괄지급’은 여전히 살아있는 정책의제다. 물고기 잡는 기술을 전수하지 않고 언제까지 국가가 물고기를 잡아줄 것인가. 자전거는 걷는 속도보다 느리면 넘어진다. 5000만 명이 생계를 유지하려면 잠재성장률만큼 성장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경제 순환이 이뤄진다. ‘1%대의 저성장 터널’에서 청년세대를 위한 일자리가 만들어질 리 없기에 ‘저성장은 저성장’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한국의 대외신용도와 원화가치 하락으로 귀결된다. 낙엽을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로 은유한 김광균 시인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을 곱씹어야 한다. 활력 잃은 경제의 얼굴 ‘원화’의 가치 하락이 우리가 직면한 정치불확실을 웅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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