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광장] ‘허니버터칩 캘린더’

입력 2025-01-0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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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희 사단법인 무의 이사장

“이 캘린더 별명이 허니버터칩이에요.”

얼마 전 카카오 디지털접근성팀에서 캘린더를 들고 왔다. 점자 캘린더였다. 시각장애 학생들이 있는 특수학교 중심으로 배포하기 위한 용도로 만든 것이란다. 그런데 왜 도대체 허니버터칩이라고 불리는 걸까? 들어보니 캘린더에 단순히 점자만 올린 게 아니었다. 첫 장을 펼치니 눈에 보이는 숫자들이 아기 주먹만 했다. 전맹 외에도 저시력자가 쉽게 볼 수 있는 큰 글자와 4.5:1의 명도 대비가 시원해 보였다.

3천 부 제작했는데 입소문을 타고 시각장애인들 수요가 늘어나면서 구하고 싶지만 구하기가 힘들다며 ‘허니버터칩’이라고 불린단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 “3달 동안 100번 정도 테스트를 하면서 만들었어요.” 현장 이야기를 종합해 여러 기능을 넣었다. 손끝으로 원하는 달을 쉽게 찾아 넘길 수 있도록 달력 하단을 인덱스처럼 만들고 인덱스에 점자를 새겼다. 캘린더에 들어간 라이언 캐릭터 그림 윤곽을 양각으로 새기기도 했다.

가장 눈에 띈 건 꾸미기용의 동그라미, 세모 등 촉각 입체 스티커였다. 하트가 꾸미기 스티커에 많이 들어가는데 동그라미와 하트 모양이 손끝으론 잘 구별이 안 되어 하트는 안 넣기로 결정했단다. 이 스티커로는 시각장애인들이 기념일을 실제 캘린더에 점자스티커를 붙여가며 꾸민단다. 의미있는 날짜에 점자스티커를 붙이는 재미를 주기에 교사들이 보조 교재로도 선호한다고 한다.

이렇게까지 공들여 만든 점자 달력엔 일종의 철학이 담겨 있다. 점자는 시각장애인들의 문해력을 높일 수 있어서 더 많이 교육되어야 하지만 국내 등록 시각장애인 중 점자 사용이 가능한 사람은 10%도 채 되지 않는다. 스마트폰에서 음성 캘린더를 사용할 수도 있지만 매일 쓰는 캘린더를 통해 점자를 일상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였단다. 놀라운 건 이걸 기획한 사람들이 소위 웹/앱서비스 접근성 기획자와 개발자였다는 거다. 디지털 서비스 기획을 위해 소비자를 만나다 보니 아날로그적 생산품이 나온 셈이다.

이렇게 전문가가 사회문제 현장을 만나면 결과물의 만족도가 급격히 치솟는다. 작년 서울시와 함께 한 경사로 확산 프로젝트인 ‘모두의 1층X서울’ 현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건축 전문가였다. 모두의1층 프로젝트에 참여한 브라이트건축사사무소는 서울 전역 140여 개의 매장을 돌아다니며 40여 개의 경사로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한 매장을 많게는 6번이나 방문하며 점주의 애로사항을 들었다.

“경사로는 튼튼한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점주들은 다양한 요구를 했어요.” 예를 들어 ‘아이들이 씽씽이나 자전거로 지나치더라도 안전하도록 옆에 날개를 달아주세요’ 같은 요구다. 점주는 경사로 설치에 흔쾌히 동의했는데 상가 번영회에서 허가하지 않거나, 경사로가 인도를 점유할 때 받아야 하는 도로점유허가를 국유지의 경우 구청에서 처리하기가 어렵다든지 하는 소위 ‘숨겨져 있던’ 현장 문제점을 찾아낸 것도 이들 전문가다. 당연히 맞춤형 경사로에 대한 만족도도 더 높을 수밖에 없다.

지난해 12월 1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국가가 장애인 접근성을 14년간 제대로 보장하지 못했으니 차별구제소송을 제기한 장애인에게 위자료 10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장애인 접근권을 헌법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기념비적인 판결이다. 하지만 물리적 접근성을 확보할 경사로나, 정보 접근성을 확보할 점자 출판물이 금세 봇물 터지듯 나올 수는 없다. 수십년 동안 굳어진 현장의 관행을 효과적으로 풀어야 한다. 사회문제에서 전문가가 수요자를 만나 솔루션을 정교화하는 것은 이 때문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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