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52. 경제위기 속 조기총선 준비하는 독일

입력 2024-12-04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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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더 구조개혁’ 소환…재도약 노려
균형재정 수정·공공투자 확대가 관건

독일(서독)은 1949년 5월 건국됐다. 75년간 독일에서 정부(내각)가 만 4년을 채우지 못하고 붕괴돼 조기 총선이 치러진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1982년 10월에 이어 지난달 6일, 단 2차례에 불과하다. 정부 붕괴의 원인도 가장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자민당) 때문이다. 또 두 차례 모두 경제위기의 와중에 연립정부(연정)가 붕괴됐다.

그렇다면 연정은 왜 붕괴됐을까? 내년 2월 23일 예정된 조기총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면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독일 경제가 재도약할 수 있을까?

예산안 이견 ‘신호등 연정’ 붕괴

독일은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가 결합돼 연정이 정치의 규칙이다. 대개 40% 안팎의 지지를 얻은 제1정당과 10% 내외의 소수 정당이 연정을 구성해왔다. 총선이 끝난 후 연정 구성을 위한 협상이 보통 2~3달 걸린다. 수십 페이지에 이르는 연정합의문에서 주요 쟁점을 합의하고 정당 대표들이 서명을 한다. 이런 단단한 합의가 바탕이 돼 75년간 연정이 붕괴된 게 단 2번에 불과했다.

2021년 9월 말 총선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3개 정당으로 이뤄진 연정이 만들어졌다. 극우 포퓰리스트 독일대안당(AfD)의 약진으로 정당구조가 파편화했다. 따라서 2대 정당인 중도우파 기독교민주당(기민당)과 기독교사회당(기사당),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정당 지지율이 계속해 하락했다. 당시 25.7%의 지지를 얻어 제1정당이 된 사민당은 녹색당(14.8%) 및 자민당(11.5%)과 ‘신호등 연정’을 구성했다. 정당의 색깔이 신호등이어 이렇게 불렸다. 11% 남짓을 기록한 자민당이 일종의 ‘킹메이커’ 역할을 수행해 재무장관과 교통장관 등 주요 각료직을 맡았다.

한 달 전 연정이 무너진 표면적 이유는 자민당의 크리스티안 린드너 재무장관이 총리의 지시를 거부해 내년도 예산안이 합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25년 예산안에서 90억 유로가 구멍이 났는데 사민당의 숄츠 총리와 연정 파트너 녹색당도 정부 재정을 풀라고 강력하게 요구했다. 반면에 자민당의 재무장관은 대규모 감세와 규제완화를 외치며 돈 지갑 풀기를 거부해 총리가 장관을 해임했다. 각료를 맡았던 자민당 의원들이 내각을 탈퇴하며 사민당과 녹색당만 남아 하원에서 과반을 상실한 ‘식물 정부’가 됐다. 원래 연방하원 선거는 내년 9월 28일 예정인데 이보다 7개월 먼저 2월 23일 총선이 치러지게 됐다.

연정 붕괴는 그러나 최소 1년 전부터 독일 언론에서 흘러나왔다. 연정은 당시 600억 유로, 약 90조 원 정도의 여유 예산을 디지털전환과 녹색전환에 지출했다. 기본법(헌법)에 규정된 정부의 순지출이 국내총생산(GDP)의 0.35%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균형재정 조항 때문에 이를 부외예산에 편입해 썼다. 야당인 기민당·기사당이 헌법재판소에 제소해 부외예산이 위헌이라 판시됐다. 이때부터 연정은 붕괴를 향해 달린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친기업적이던 자민당은 헌재 판결 후 더 균형재정 사수를 외치며 여유 재정 지출을 거부했다. 자민당은 9월 말부터 연정 붕괴의 시나리오를 짜서 시기만 노렸다. 정당 지지율에서 5%를 넘어야 연방하원에 진출할 수 있는데 자민당은 올 초부터 지난달 24일 조사에 이르기까지 지지율이 4%에 불과하다. 하원에서 퇴출 위기에 몰린 자민당이 친기업적 정당임을 강조해 조기총선에서 하원 진입을 노려보려는 심산으로 연정을 무너뜨렸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지난달 6일 정부 각료들과 만난 후 연정 붕괴를 발표하고 난 뒤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베를린/AP연합뉴스
기민·기사당으로 정권교체 유력

중도우파 기사당은 바이에른 지역 정당이어서 연방하원에서 기민당과 기사당은 하나의 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올 초부터 기민·기사당은 지지율 31~32%로 1위를 기록 중이다. 2위는 AfD로 18%, 3위는 집권여당인 사민당으로 15% 내외다. 기존 정당들은 극우정당 AfD와의 연정을 거부한다. 따라서 내년 2월 23일 조기총선 후 연정 조합은 기민·기사당과 사민당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만약에 12% 안팎을 기록 중인 녹색당이 지지율을 더 제고하고 기민·기사당도 지지율을 올리면 이 조합도 가능하다.

독일은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가운데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경제의 20%, 20개국 단일화폐 유로존 경제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그런데 균형재정 조항 때문에 GDP 대비 독일의 공공투자는 3% 정도로 EU 평균보다 1%포인트 낮다. 속도제한이 없는 고속도로 아우토반과 다리, 철도 등 곳곳의 정비와 재투자가 시급하다. 하지만 이 조항 때문에 정부 지갑은 두둑해도 풀지 못한다.

기민·기사당도 이 조항 준수를 외쳐왔으나 최근에 약간의 입장변화가 있었다. 인프라 투자에 한해서 이 조항을 일부 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기민당의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 기민당 총재는 복지 지출이 아니라면 다른 투자를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경제회복 위해‘어젠다 2030’ 제시

독일은 성공적 구조개혁의 경험을 갖고 있다. 2002~2003년 독일 경제는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급속한 통일 후유증으로 독일은 ‘유럽의 병자’가 됐다. 당시 사민당의 게르하르르 슈뢰더 총리는 ‘어젠다 2010’을 제시해 복지를 대폭 축소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을 도입했다. 정년퇴직 연령을 65세에서 두 살 높였고 실업급여 지급 기간도 최대 20개월이나 줄였다. 이런 구조개혁 덕분에 독일은 2005년부터 14년간 영국보다 경제성장률이 높았다.

메르츠 총재는 지난달 ‘어젠다 2030’을 선거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전의 성공한 어젠다를 복기해 경제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해 보겠다는 것. 새로운 구조개혁이 성공하려면 연정 파트너로 유력한 사민당과의 타협이 필수적이다. 사민당 일부에서는 최근 기민·기사당이 주도하는 연정 참여의 조건으로 복지 축소 최소화 그리고 균형재정의 수정을 요구했다. 기민·기사당은 어젠다 2030을 추진할 수 있고 사민당은 노동자와 서민을 위한 정당이기에 복지축소 최소화를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윈윈’이 가능하다.

올 해 EU 경제는 0.8~1% 성장이 예상된다. 최대 경제대국 독일이 EU 평균 정도만 성장해도 EU 경제는 최소 1% 중반대 성장을 구가할 수 있다. 구조개혁의 결실을 맛본 경험을 간직한 독일이 다시 한번 개혁을 실행해 경제 재도약의 계기를 마련하기를 기대해 본다.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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