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고독한 현대인의 한 초상

입력 2024-08-0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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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립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명예교수

<‘제로 퍽스 기븐’, 르쿠스트·마르 공동감독, 2021년>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비행기 탑승구에서 한 승객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 항공사의 규정이 바뀐 걸 모르고 규격을 초과하는 가방을 갖고 온 모양이다. 승무원은 “지불은 뭘로 하실래요?”라고 묻는다. 승객은 돈이 없으나 동생의 생일이라 꼭 가야 한다고 간청한다. 그러나 승무원은 “혹시 돈 부쳐줄 지인 없으세요? 20~30분 남았어요”라고 말할 뿐이다. 그러고는 다른 승객을 응대한다. 카메라는 그 젊은 여자 승객의 얼굴에 계속 머무른다.

영화 제목 ‘제로 퍽스 기븐’(Zero Fucks Given)은 “I don’t give a sh*t”(관심 1도 없어)과 같은 뜻이다. 그걸 수동태로 변형한 것이다(sh*t은 f*ck으로 바꿔도 된다). 우리말로 하면 ‘1도 안 주어진 관심’쯤 된다. 위의 장면에서 승객이 느낀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일 테다. 승무원이야 그냥 원칙을 지킨 것일지 모르지만 승객은 너무 삭막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사실,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영화는 저가 항공사 승무원인 26세의 카산드라의 일상을 따라간다. 위 장면에 목소리로만 등장한 승무원도 그녀다. 그녀의 인간관계는 깊지 않다. 동료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지만, 절친이나 애인이 없다. 데이팅 앱으로 남자들과 짧은 만남을 한다. 직업상의 욕심도 별로 없다. 좋은 항공사 가려면 여러 외국어를 구사해야 하는데 그녀는 모국어 외에 영어 정도만 한다. 파업 동참을 부탁하는 직원들을 마주쳤을 때는 관심을 안 보인다.

그녀가 무정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정을 줄 때면 문제가 생겼다. 승진한 후 (승진 못하면 퇴사해야 했다) 다른 승무원들에 대한 평가에서 모두 좋은 점수를 줬는데 그 때문에 상사한테서 질책 당한다. 그만한 이유를 설명했음에도 상사는 원칙을 고집한다. 조금 더 큰 사건도 발생한다. 한 초로의 승객이 외국으로 큰 수술을 받으러 가는데 그 때문에 심리가 불안정하다. 카산드라는 그녀를 동정해서 자기 카드로 술을 사준다. 그러나 그 때문에 (편법으로 실적을 올리려는 걸로 간주된 것 같다) 그녀는 해고에 가까운 처분을 받는다.

그녀가 눈물을 보이는 장면이 딱 한 번 있다, 통신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통화 중에 그녀는 자기 휴대폰이 어머니 명의로 되어 있는 걸 상기하면서 눈물을 글썽인다(어머니가 2-3년 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게 초반에 언급된다). 필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특별히 해석하고 싶다. 어머니는 ‘관심 1도 안 줌’의 정반대의 존재라 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래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 같다.

거의 해고 당한 주인공은 고향의 집을 찾는다. 아버지와 동생을 만나고, 동네 친구들과도 논다. 그러나 결국 승무원의 길로 돌아온다. 전세 비행기를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두바이의 항공사에 면접을 보고, 합격한다. 면접은 원격으로 진행되는데 역시 건조하다. ‘퍽’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면접관이 일어서서 한 바퀴 돌아보라고 하는데 (요즘 세상에 그래도 되나?) 주인공은 아무런 자의식 없이 수행한다.

전반부에 반젤리스의 음악 ‘미지의 남자에게’를 배경으로, 주인공이 가방을 끌고 가는 걸 길게 찍은 장면이 있다. 필자는 그 롱테이크에 반했다. 약간 슬프면서도 경쾌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을 준다. 관광지에서 혼자 캐리어를 끌고 길게 걸어 본 사람이면 공감할지 모르겠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언급했다. 이 영화의 주제는 고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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