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47. 영국 총선 노동당 압승과 산적한 과제

입력 2024-07-1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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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 군사학과 교수·국제정치학

親성장·기업 표방…경제회복 관건
최대시장 EU와 관계개선 나설 듯

‘보수당 역사상 최악의 패배.’ 이달 4일 치러진 영국의 조기 총선에서 보수당은 전체 의석 650석 가운데 121석을 얻는 데 그쳤다. 1834년 현대 정당의 기틀을 갖춘 보수당 190년의 역사상 최악의 패배다. 강경한 이민정책을 요구하는 영국개혁당이 보수 진영의 표를 갉아 먹어 보수당이 참패했다. 제1야당 노동당은 1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했으나, 지속되는 저성장과 750만 명이 넘는 병원 치료 대기자 수 줄이기 등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다.

노동당의 승리가 일찍부터 예상된 가운데 이번 영국 총선의 관전 포인트는 과연 몇 개 의석을 차지할지였다. 소선거구제로 한 명만 선출되는 선거에서 노동당은 411석을 얻어 압승했다. 34%의 지지를 얻었을 뿐인데 보수 표가 갈라지면서 어부지리를 차지했다.

극우 영국개혁당에 보수표 분열

영국개혁당의 나이젤 패라지(Nigel Farage)는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찬성 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극우 포퓰리스트다. 그는 원래 이번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했다가 지난달 초 이를 번복하고 출마했다. 또 609개 선거구에서 개혁당 후보자가 대거 출마해 보수당 표를 잠식했다. 지역구 기반도 별로 없던 개혁당은 그의 명성에 의거해 이번 선거에서 무려 14% 지지를 얻었고 5석을 확보했다. 패라지도 8수 만에 하원의원이 됐다.

그는 보수당이 브렉시트를 배신했기에, 그리고 미 공화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트럼프를 지지하려 불출마를 번복했다고 밝혔다. 패라지는 EU와 아무런 합의없는 강경 브렉시트를 요구했으나 집권 보수당은 EU와 가장 낮은 단계의 탈퇴조약에 합의했다. 5월 중에 패러지는 트럼프 선거 진영으로부터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영국에서 극우 민족주의 바람을 일으켜 트럼프를 도와주고자 출마했다고 강조했다.

영국개혁당은 의료와 요양 등 필수분야의 이민만 받고 나머지는 피란민 등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이민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또 선진국이 후진국을 도와주는 공적개발원조(ODA)에 현재 국민총소득의 0.5% 정도를 쓰는데 이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다. 저성장이 지속되는 바람에 영국도 살기 힘든데 왜 후진국 지원에 돈을 이렇게 많이 지출하냐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의 이런 공약은 보수당의 실정에 실망한 전통적인 보수당 지지자들을 끌어들였다. 득의양양한 패라지는 하원에서 진정한 야당이 되겠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대패한 보수당의 경우, 2~3달 안에 새 당수가 선출될 예정이다. 신임 보수당 총재는 아무래도 ‘집토끼’를 잡기 위해 이민정책 등에서 영국개혁당에 버금가는 더 강경한 입장으로 선회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강경한 요구는 정권 교체에 성공한 노동당의 정책 재량권을 제한할 수 있다.

▲ 키어 스타머 영국 노동당 대표가 5일(현지시간)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총선 승리 연설을 하고 있다. 노동당의 총선 압승을 이끈 스타머 대표는 이날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런던/로이터연합뉴스

브렉시트 이후 저성장, 불만쌓여

키어 스타머(Keir Starmer) 신임 총리는 인권 변호사 출신이다. 2015년 52세에 하원의원이 돼 2020년 노동당 당수가 됐다. 전임자 제레미 코빈이 더 왼쪽으로 변모시킨 노동당을 중도 쪽으로 다시 방향전환했다. 또 14년 보수당의 실정을 집중 공략하면서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했고, 보수당의 표가 갈라져 압승할 수 있었다.

그는 친성장, 친기업적인 선거공약을 제시해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2022년 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전 영국은 선진7개국(G7) 가운데 계속해서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2022년부터 독일이 이 불명예 타이틀을 차지했으나 영국의 저성장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0.5% 정도의 경제성장률이 예상된다. 영국 교역의 절반 정도가 가는 EU로부터 탈퇴한 후 대(對)EU 무역이 줄어든 만큼 이를 보완할 시장개척이 아직 요원하다.

영국의 제2 무역시장인 미국과의 교역은 대EU 교역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의 FTA는 말만 무성했을 뿐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EU 탈퇴 이전에 영국 기업들은 EU 회원국과 교역 시 아무런 장벽도 없이 거래할 수 있었다. 브렉시트 후 통관절차가 도입되고 인력의 자유이동도 금지돼 물가와 인건비도 상승했다. 반면에 임금은 가파른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해 시민들의 불만이 누적됐다.

스타머 총리는 브렉시트가 너무 분열적인 이슈여서 아주 점진적으로 유럽연합과 관계를 개선하겠다고만 밝혔다. 일단 안보 분야의 협력은 EU와 정책 차이가 없어 우크라이나 지원을 지속할 것이다. 올 초 EU의 연구개발 프로그램인 ‘호라이즌(Horizon)’에 예산을 납부하고 참여하는 것처럼 실익이 분명한 EU의 개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EU와 점차 관계를 개선하면 경제 성장률 제고에도 도움이 된다.

붕괴된 의료체계 개선 시급해

무료 건강보험(NHS) 치료 대기자 수 줄이기는 매우 어렵다. 2024년 2월 말 현재 긴급한 수술 등을 제외하고 750만여 명이 치료를 대기 중이다. 시민들은 거주지 1차 의료기관의 의사를 만나 진료를 받는데 평균 10일이 걸린다. 여기서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겨 2차, 3차 기관으로 보낸 환자들은 평균 13주가 넘게 기다려야 한다. 2019년 초에는 대기자 수가 420만 명에 불과했는데 5년 만에 330만 명이 더 기다린다.

영국 공공 서비스 지출의 38%가 NHS에 투자되지만 의료 인력은 9%나 부족하다. NHS 지출이 폭증하는 의료 수요에 크게 밑돌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보수당은 총선에서 이겨보려고 건보료를 계속 인하했다. 근로자 과세 표준액의 12%였던 건보료를 1월부터 10%로, 4월부터는 추가로 2%포인트 인하했다. 설문조사를 보면 시민들은 건보료를 더 내더라도 NHS 대기자 수 줄이기를 원한다.

노동당은 증세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NHS 투자를 늘리려면 세금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아울러 경제성장률을 제고하면 실질 임금이 오를 수 있어 건보료 재정도 개선될 수 있다.

스타머 신임 총리는 5일 총리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 앞에서 “우리는 영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극우 세력이 대두하는 가운데 영국은 이번 총선에서 진보 정당이 승리했다. 영국의 이런 변화가 유럽 대륙에도 확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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