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잊으시면 안 돼요”

입력 2024-06-1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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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폐암은 사악했다. 넓고 넓은 폐에서 몸을 숨겨 종격동 뒤로 은폐했다. 결국 좌측 경부 임파선이 부풀어 올랐을 때야 놈의 존재를 의심했다. 정밀검사를 위해 대학병원으로 의뢰했고 그녀의 몸에 사악한 폐암이 자신을 철저히 숨겨 이제까지 자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놈이 진즉부터 숨어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간접적인 증거들이 나를 무안하게 했다.

이제는 최선을 다해야 할 때 폐암 치료에 권위가 있는 병원을 찾아드렸고 다행히 새로 나온 항암제에 반응이 좋은 유전자 변이를 가진 것으로 나와 희망을 걸었다. 그리고 정말로 약은 효과가 좋았다. 살이 터지고 진물이 흘러나오고 사지 감각이 뒤틀려 밤에 잠을 못 자니 이 약은 정말 사악한 폐암 덩어리를 녹이나 보다. 그러니 멀쩡한 세포와 조직도 파편에 맞아 이렇게 부서지고 있다.

그러나 2~3개월이 지나고 그녀는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교수님 몰래 하루 세 번 먹어야 하는 걸 하루 한 번만 먹고 있다고 했다. 처방받은 대로 약을 드시라고 말씀드리기에 환자는 너무 붕괴되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고 도와드릴 수 없는 상황에서 비집고 나온 말이 힘을 내시라고, 기도하겠다는 것이었다.

나의 종교와 그녀의 종교가 같을까 가늠하기 시작할 때 진료실 밖을 나서는 그녀가 갑자기 뒤로 돌아 눈을 똑바로 뜨고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잊으시면 안 돼요.” 내 기도에 그녀를 잊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인지, 이제껏 그녀를 돌봐왔던 주치의로서 그녀 자신을 잊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간절함이 진료실을 채웠다.

그게 무슨 뜻이건 이제 나는 그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도움도 못 되는 상황을 어물쩍 넘기고자 했던 ‘기도’는 이제 나의 책무가 되었다. 내 기도에서도, 내 진료에서도 나는 그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조석현 누가광명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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