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호의 정치원론] ‘정략 틀’에 갇힌 정치 경계해야

입력 2024-05-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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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여야 탓하기 공방에 냉소주의 만연
책임 사라지고 원칙·규범은 무너져
지식인들 정치권에 휩쓸리지 말길

학문 세계에서 인과관계 정립은 가장 힘든 과제다. 너무 힘들어 확언을 허락하지 않는다. 특히 사회현상과 관련해 그렇다. 사회현상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고 사람들의 주관적 인식 속에서 압축적으로 규정되는 모형이다. 그런 사회현상과 관련해 원인-결과 관계를 확실하게 말할 수 있겠는가. 다각도의 관찰과 추론 후에야 어떤 인과관계의 일반적 경향을 어렴풋한 확률의 영역에서 조심스럽게 논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어려운 인과관계를 너무 쉽게 남용·오용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그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안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그 원인은 무엇이라고 단언하며 탓을 한다. 선거 패배는 당 대표 때문이니, 대통령 때문이니 하나의 원인만 지목하며 모든 책임을 거기로 돌린다. 국정 난맥상의 원인은 대통령의 무능 때문이니, 야당의 훼방 때문이니 한쪽만 쳐다보며 탓하기 공방을 펼친다.

남북 관계의 악화는 이전 정권의 유화 기조 때문이니, 현 정권의 강경 노선 때문이니 일차원적 인과관계에 매몰돼 서로를 탓한다. 세월호, 이태원, 해병대원 등 사회적 참사에도 정치권의 단순 무식한 인과관계 주장과 남 탓 경쟁은 이어진다.

머리 좋은 정치인들이 인과관계 정립의 어려움을 모르겠는가. 자신들의 남 탓 주장이 방법론적으로 얼마나 허술해 각종 관찰의 왜곡, 논리의 비약, 해석의 과장을 담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이 굴하지 않고 인과적 주장을 지어내고 일방적 탓하기에 몰두하는 건 정략적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개인의, 혹은 소속 정파나 당의 이익과 위상을 위해 반대편에 책임을 떠넘기는 인과적 주장에 의존하며 유권자를 오도(誤導)하려 든다. 서로 충돌하는 정략적 목적을 추구하는 그들 간에 어떤 문제의 원인에 관한 소통과 합의가 이뤄질 수가 없다. 인과관계에 대한 그들의 논쟁은 결론 없이 끝없이 이어지며 유권자마저 인식의 혼돈에 빠뜨리고 원칙과 정도(正道)에 관한 논의를 가로막는다.

이때 희생되는 건 정치인들의 양심만이 아니다. 더 심각하게는, 유권자의 인식이 왜곡되거나 혼란스러워지고 적절한 당위적 사회 규범마저 논외로 무시된다. 선거 패배의 현실적 원인을 놓고 말싸움이 공전(空轉)하는 사이에 선거 후보자들의 자세, 선거운동 방식, 선거 후 당 지도부의 처신에 대한 당위적 원칙성, 도의적 책임성은 언급조차 되지 않으며 묻힌다.

국정 난맥상의 원인에 대한 여야 상호 탓하기가 쳇바퀴처럼 도는 동안 대통령의 국정운영, 여당의 역할, 야당의 방향성에 관한 규범적 적절성은 논의의 주변부로 밀린다. 남북 관계를 인과적 탓하기 맥락에서 논하는 가운데 통일, 체제 이념, 호전적 외부 위협에의 대응에 관한 바른 원칙과 보편적 정의는 별 주목을 받지 못한다.

정략적 틀에 갇혀 사는 정치인들에 의한 이런 폐해가 커져 우려스럽다. 유권자는 정치권의 쉼 없이 겉도는 탓하기 공방에 혼란을 느끼고 최악의 경우 무기력한 냉소주의에 빠진다. 당위적 가치를 담은 사회 규범은 그 존재가 가려지며 희미해진다. 적극적 시민이 생기를 넣어주어야 할 민주주의의 위기이고, 규범적 원칙이 연대감·통일성·정체성을 기해줘야 할 국가체제의 위기다.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책임성은 불확실한 사회현실에 관한 어설픈 원인 분석으로 확보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한 분석으로는 두루 공감할 결론에 도달할 수 없기에 논쟁만 영구히 이어지며 그 와중에 책임성이 실종된다. 당위적 규범과 원칙에 대한 성찰·고민·숙의가 필요하다.

학자, 교사, 언론인, 법조인, 공무원을 비롯한 식자층에서라도 그러한 당위적·규범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일반 시민을 인식의 혼란과 무기력에서 구하고 사회 규범을 세워야 한다. 식자층이 양극화된 정치권에 블랙홀처럼 휩쓸려 들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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