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기업 밸류업의 첫 단추 ‘사외이사制’

입력 2024-03-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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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감시·투자자 보호가 본래임무
주주이익보다 경영진 봉사로 변질
독립절차 따른 선임으로 개선해야

연초에 정부가 앞장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해소하겠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한국 증시의 고질적 저평가 증상이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실제로 공개된 ‘기업가치 밸류업 프로그램’은 지배구조의 본질적 문제는 건드리지 않고 기업의 자율적 노력을 장려하는 소극적 방안만 담고 있어 실망만 키웠다.

투자가들은 배당세, 법인세, 상속세 등의 세제 개편과 소액주주 보호를 강화하는 상법개정안이 기업 밸류업에 포함되기 원하였다. 하지만 이런 제도 개선과 법안 개정은 단기간에 이행하기 어렵다. 정부만 노력해서도 가능하지 않다.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야 하며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국론이 분열되고 정당 간의 대립이 첨예한 상황에서는 난감한 과제다.

세제나 상법을 건드리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기업가치를 올릴 수 있는 방안은 사외이사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다. 원래, 사외이사 제도는 외환위기 이후 2001년에 기업주의 전횡을 견제하고 기업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되었다. 지배주주와 관련이 없는 전문가들로 선임된 사외이사는 법률상 상근이사와 동일한 권한과 책임을 갖고 객관적 입장에서 경영진의 직무집행을 감독하며 투자자 이익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의 사외이사 제도는 본래의 취지와 전혀 다르게 운영되고 있다. 매년 주총 시즌이 되면 주요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누가 선임되었고 그 사유가 무엇인지 언론에 기사로 나온다. IT전공 교수인 경우는 회사 측이 추진 중인 각종 신사업 현안에 대해 기술 기반의 조언을 충실히 해줄 것이라는 설명이 달린다. 산업통산자원부 출신의 관료는 산업 및 행정 분야의 재직경력을 활용하여 회사 발전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소개한다. 국세청 출신 세무 전문가에게는 주주들과 회사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여 합리적이고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인다.

이런 사유가 사외이사를 뽑는 취지에 합당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 회사 사업에 도움이 되는 자문이 필요하면 전문 컨설턴트를 고용하면 되지 사외이사로 뽑을 일이 아니다. 산업부 전관에게 회사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여해 달라는 것은 너무 노골적인 요구다. 국세청 출신에게 주주와 회사의 이익을 함께 고려하여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할 것이란 표현은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주주의 이익을 위해 경영 투명성을 높이는 사외이사 본연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것이라는 사유가 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외이사는 누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ESG 경영을 추진하는 기업들은 지배구조(G) 평가를 의식하여 사외이사 구성에서 여성의 비율을 높인다. 여성 사외이사가 늘어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그렇다고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기업가치가 올라가지 않는다.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사외이사진의 경력이나 구성이 미흡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외이사 제도의 문제는 누가 사외이사를 선임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은 대부분 대주주나 경영진이 사외이사 후보를 고르고 선정하다. 그러니 경영진의 관점에서 사외이사 후보 선정 사유로 회사 발전에 기여할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댄다. 아무리 전문성이 우수하고 평판이 훌륭한 명망가라 하더라도 자신을 사외이사로 선임해 억대에 가까운 보수를 받게 해준 경영진을 견제하고 대립할 정도로 무모한(?) 용기를 갖지 못한다. 이사회에서 사사건건 따지고 반대하면 물정을 모르거나 배은망덕하다고 찍힌다. 안건에 대해 몇 가지 질문만 해도 까칠하다는 소문이 퍼지고 연임은 물 건너간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경영진의 편에 사외이사가 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무 상관도 이해도 없는 소액 주주를 위해 감시자 역할을 하라는 요구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기업 밸류업의 첫 단추는 사외이사 선임 방법을 개선하는 것이다. 사외이사의 일부라도 외부에서 선임하게 하면 이사회가 획기적으로 변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작년에 kt가 사외이사를 선임한 절차에서 배울 시사점이 많다. kt는 사내 이사를 배제하고 외부 전문기관과 주주들의 추천을 통해 사외이사 후보군을 모집하였고 독립적인 인선자문단을 구성하여 후보들을 심사한 결과에 따라 사외이사 7인 전원을 선임하였다. 이처럼 객관적인 절차를 통해 독립적 사외이사를 뽑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외이사의 보수나 연임 기준에 기업가치를 반영하는 것도 필요하다. 주주의 이해가 일치하도록 하면 사외이사가 자연스럽게 기업의 밸류업을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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