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정치인들 그릇된 선민의식
짝퉁진보 퇴출로 정치개혁 이루길
최근 여당의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비대위원 구성과 공천에 있어서 세대교체를 추진하고 있다. ‘정치 개혁’ 한다면서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세대교체는 수긍하기 어렵다.
세대교체만 떼놓고 보면 나이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이를 잣대로 하니 여러 부작용이 생긴다. 일부 정치인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노인 비하 발언이 대표적이다. 최근 이준석 대표의 ‘경마장 하차’ 발언은 사실 왜곡이며, 작년 8월 김은경 혁신위원장의 ‘남은 수명에 비례한 투표권 행사’ 발언은 섬뜩한 측면이 있다. 2004년 정동영 의장은 60대 이상 70대 노인을 향해 투표하지 말고 ‘퇴장하실 분’이라 하였고, 같은 해 유시민 의원은 50대 이후 멍청해지므로 ‘65세 넘으면 때려 죽어도 책임 있는 자리에 가지 말라’고 저주성 발언을 한 바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은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간은 물리적, 기계적으로 나누어지는 개념이 아니다. 현대철학에서 시간은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건을 계기로 하여 파악되는 부차적인 개념이다. 여기서 ‘사건’은 언론이나 사법 시스템에서 언급되는 의미와 다르다. 그 뜻은 살아오면서 겪는 경륜이나 불교의 업(業)에 가깝다. 일상적으로 보면 지속되는 경험의 계기(繼起)를 사건으로 나누어 인식한다. 이 과정에서 일상적 편의를 위하여 분할한 것이 시간이다. 이러한 시간을 토대로 세대를 나누는 것은 잘못이다. 기성세대를 부정하는 일부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조차도 앞세대의 사건들이 축적되어 표출된 결과이다. 따라서 나이를 잣대로 세대 갈등을 부추기거나 여명(餘命)에 따른 참정권 제한과 같은 노인 비하 발언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오히려 미국을 대표하는 철학자 존 듀이가 자신의 역작 상당수를 낸 것도 60세 이후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할 때 획기적인 일이다.
‘86세대’처럼 나이를 잣대로 한 말은 정치 개혁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이 말은 새 밀레니엄 시작 무렵 80년대 대학 학번인 1960년대 태어난 30대 ‘개혁’ 정치인을 지칭하는 ‘386’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이들의 절반이 나이 60이 넘은 현 시점에서 86 정치인들은 정치적 퇴행 행태와 함께 온갖 비행으로 사법 심판도 받고 있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적폐는 86 운동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총련을 중심으로 한 97 운동권에도 해당한다. 얼마 전 제1야당에서는 86 전대협과 97 한총련 운동권 정치인들 간의 공천 갈등도 있었다. 따라서 나이를 잣대로 마치 벌초하듯이 정치인을 퇴출 대상으로 삼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정치 개혁의 본질은 75, 86, 97이라는 나이를 근거로 한 세대 구분이 아니라 자칭 운동권을 내세우는 정치인들이 개혁과 진보를 표방하면서 이념적 편집증에 천착하는가에 있다.
첫째, 운동권 정치인들의 이념이 시대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21세기 문명 패러다임에 역행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이분법적 선악 구도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윈윈전략을 배격하여 우리나라를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게다가 일부는 낡은 이념도 모자라서 번영과 풍요의 대한민국을 인정하지 않는 종북(從北) 행태를 서슴지 않는다.
둘째, 운동권의 이분법 구도는 자신들의 선민의식으로 변질된다. 이들은 우월의식을 토대로 온갖 비리와 부패를 자행하고도 내로남불 행태를 보인다. 여기에 운동권에 몸담지 않고 성실하게 국가 발전에 공헌한 이들에게 부채의식을 음양으로 강요하는 폐해도 심각하다.
셋째, 자기모순 행태도 퇴출 기준이다. 운동권 인사들은 그간 보상받아 왔던 과실이 75 이전 세대의 공헌임을 부정하는 일종의 부친살해(patricide) 행태를 보인다. 정작 적폐 대상인 자신들이 선대를 적폐로 몰아세운 것은 자기모순이다. 노인을 ‘퇴장하실 분’이라던 정치인이 그 나이 되어 이번 총선에 출마한다는 것도 모순이다. 또한 86이건 97이건 운동권 정치인들은 연고주의 타파를 외치면서 ‘운동권 연고주의’라는 새로운 적폐를 낳았다.
이번 총선은 짝퉁 ‘진보’를 퇴출할 정치 개혁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기준을 나이에 두어선 안 된다. 퇴출해야 할 정치인은 86운동권만이 아니라 세대 불문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