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현 칼럼] 한무제의 ‘일국양제’가 차라리 낫다

입력 2024-01-30 05:00수정 2024-01-30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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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허울만 좋은 ‘홍콩체제 50년 보장’
금융허브 추락…자산탈출 가시화
국내 ELS 파동 유탄…경각심 갖길

어제 홍콩에서 ‘민사 및 사업 문제에 대한 본토 판결 및 상호 집행 조례’가 시행됐다. 홍콩 법원과 중국 법원이 각기 내린 민사 판결, 명령을 상호 인정하는 내용이다. 말은 쉽지만, 실체는 간단치 않다. 중국 법원이 홍콩 자산에 대해 직접 압류, 몰수, 동결 등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새 조례에 따르면 같은 사안에 대해 홍콩과 중국에서 별도 소송할 필요가 없다. 제도적 보완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이 사유재산을 통제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홍콩 자산 엑소더스’가 촉발될 것으로도 점쳐진다. ‘일국양제(一國兩制)’가 무의미해졌다는 관측도 대두된다.

매번 이런 식이다. 중국 통제 수위가 높아져 적색등이 켜질 때마다 ‘일국양제 약속’을 찾는 아우성이 터져 나온다. 2020년 홍콩보안법이 발효됐을 때도, 2021년 야당 신민주동맹(ND)이 해산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허깨비를 찾는 셈이다. 중국이 홍콩 체제를 50년 동안 보장하겠다고 다짐한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1국가 2체제의 약속, 일국양제였다.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은 영국과의 1984년 공동성명에 반영했다. 1997년 7월 1일 홍콩 반환 당시 장쩌민 국가주석도 장담했다. 하지만 공약을 믿다가는 때로 큰 탈이 난다.

약속이 나온 배경을 보자. 덩샤오핑은 1982년 홍콩 회수를 주창했다. 파장이 컸다. 홍콩 주가는 반 토막 났고, 주택 가격도 폭락했다. 껍질만 남을 판국이었다. 덩샤오핑이 급히 꺼내든 사탕발림 무마책이 일국양제였다. 더욱이 현재의 중국은 실용주의자 덩샤오핑의 중국이 아니라 권위적인 시진핑의 중국이다. 관용 정신을 어찌 기대하겠나.

홍콩은 예나 지금이나 아시아 금융 허브다. 하지만 ‘허브 유적지’가 될 판국이란 비탄이 흘러나온다. 물론 엄살이다. 하지만 머잖아 끝물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다들 틈만 나면 홍콩을 빠져나간다. 2021년에 중국을 제외한 타국으로 이주한 홍콩 주민이 9만8100명에 달했는데 2022년엔 상반기에만 10만 명을 넘어섰다. 기업, 자본도 마찬가지다. 혀만 찰 계제가 아니다. 한반도로도 유탄이 날아든다.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부터 그렇다.

지난주까지 확정된 국내 주요 은행의 H지수 ELS 손실액이 3121억 원이다. 손실 규모는 상반기 중 6조 원까지 불어날 수 있다고 한다. 날벼락이다. 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국내 상장지수증권(ETN) 조기 청산 우려도 현실화했다. 왜 이런가. 일국양제 약속에 관한 서방의 배신감을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홍콩 체제가 베이징의 헛기침에도 휘청거리게 된 것이 근본 원인이다. 정치·안보와 경제는 원래 동전의 앞뒷면이다.

동북아 지정학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일국양제는 애초에 대만을 향한 애정 공세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덩샤오핑은 1979년 대만이 ‘조국’으로 돌아온다면 대만 제도를 존중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일국양제였다. 그러다 홍콩이 발등의 불이 되자 그쪽에서 먼저 활용됐다. 일국양제가 어찌 작동하는지, 대만 지식인들은 목을 길게 빼고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일국양제는 감언이설이란 사실이, 미끼라는 사실이 환하게 드러난 지 오래다. 홍콩 일각에서만 허깨비를 찾을 뿐이다. 제정신을 가진 대만 지식인이 이런 현실을 모를 리 없다. 베이징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양안 관계가 베이징 의도대로 풀릴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중국이 전쟁 불사를 외치니 탈이다. 유탄이 어찌 튈지 모른다. 홍콩, 대만만이 아니다. 우리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일국양제는 덩샤오핑의 독창적 발명품일까. 그렇지 않다. 고대 중국의 한무제도 시행했다. ‘인기고속’(因其故俗·그 나라의 풍속에 따른다)이다. 한무제는 각국의 제도, 풍속을 존중하고 세금도 걷지 않았다. 현대 중국보다 차라리 나은 감이 없지 않다. 지난해 가을 신간 ‘사라진 홍콩’을 낸 류영하 교수(백석대·중국어학)는 철학자 헤겔의 경구를 인용했다. 일국양제 본색이 드러났는데도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베이징 사람들은 소처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민중과 정부가 역사로부터 무언가를 배운 적은 한 번도 없고, 역사에서 이끌어낸 교훈에 따라 행동한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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