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바로 그날…역사 속 12·12는 영화와 어떻게 달랐나 [이슈크래커]

입력 2023-12-12 15:40수정 2023-12-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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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하나회’ 등 신군부 앞세워 계엄사령관 제압…쿠데타 발발
군사 반란 성공 최규하 체포동의안 사후재가 표기 중요 포인트
영화 속 이태신 경복궁 포격 명령 등 사실과 달라

▲영화 ‘서울의 봄’.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몰이에 나서고 있다. 12일 자정까지 누적관객수 716만 명을 기록하는 등 ‘천만 관객’도 가시권에 들어오며 코로나 사태 이후 세 번째 1000만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등장인물들이 가명을 썼지만, ‘서울의 봄’은 분명 대한민국의 1212 군사 쿠데타라는 현대사 비극을 다룬다. 영화 티저가 공개되면서부터 주목을 받은 황정민의 전두광은 1212 군사 쿠데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모티프다.

김상수 감독은 17일 KBS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역사적 인물’을 굳이 바꾼 이유가 있었냐는 질문에 “1212 이야기를 그대로 재현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기록에는 없지만 상상으로 한 곳에 모은 인간군상을 재현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며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가져오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름도 바꾸고, 인물들의 싱크로률 맞출 생각은 않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 속에 나오는 모든 장면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아니다. 영화의 일부는 감독의 상상력을 더해 구성됐고, 일부는 사실에 기반해 구성됐다. 이에 44년 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2월 12일을 맞아 역사 속 그날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하나회’ 앞세워 군사 반란…12·12 그날의 진실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이다. 본래 ‘12·12 사태’라고 불렸지만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통해 쿠데타였던 것이 드러났고, 이후 공식적으로 ‘12·12 군사 반란’으로 불리고 있다.

이들이 이끌던 신군부세력은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가 중심이었다. ‘하나회’는 육군 내 비밀 사조직으로, 육군사관학교 11기(1955년 임관) 동기 및 후배들을 중심으로 구성, 철저한 점조직 형태로 운영됐다.

▲1979년 11월 6일 전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12·12 군사 반란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같은해 10월 26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을 권총으로 암살하면서 유신 체제가 막을 내린 10·26.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최규하 국무총리가 계엄령을 선포,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됐다. 최규하는 같은 해 12월 6일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차지철이 죽고 김재규가 체포되자, 당시 정상적인 정보기관은 전두환이 수장으로 있는 국군보안사령부 뿐이었다. 이에 전두환은 김재규 사건의 수사를 총괄하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른다.

전두환이 군검찰, 경찰, 검찰, 중앙정보부 등 모든 관련 기관을 손아귀에 쥐자,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는 전두환을 동해안 경비 사령관으로 내보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관련 정보가 하나회에 유출되면서, 전두환 등은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10·26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것을 문제 삼아 그를 체포한 뒤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12일 저녁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함과 동시에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 병력 50명을 동원,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하여 정승화를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반란 성공했지만…최규하 ‘신의 한 수’에 발목 잡힌 전두환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 행위에 대한 재가를 요구했으나, 최규하는 “수사 과정에서의 단순 진술만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할 순 없다”며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먼저 상의해 볼 것”이라고 재가를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국방부 장관은 한미연합군사령부로 도주한 상태였다. 그는 뒤늦게 국방부로 돌아왔다가 반란군에게 붙잡혔다. 결국 노재현은 하나회의 압력에 정승화 체포동의안에 서명했고, 최규하도 육군참모총장 체포를 재가했다.

그러나 최규하는 체포동의안에 ‘12월 13일 오전 5시10분’이라는 재가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최한규(최규하) 대통령이 재가 서명 중 서류 밑에 시간을 병기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이 결제가 정상호(정승화) 총장 체포 뒤 이뤄진 ‘사후재가’임을 남긴 것이다.

▲영화 ‘서울의 봄’.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이 표기는 향후 문민정부에서 열린 12·12 군사 반란 재판에서 하나회 일원들을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증거로 남았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전두환이 12월12일 6시20분 경 국무총리 공관에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승화 총장에 대한 체포 재가를 요청하였을 때 대통령이 묵시적으로라도 이를 승낙하였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없고, 오히려 이를 거절하였음을 알 수 있다”며 “대통령이 12월13일 새벽 5시10분 경 정 총장의 체포를 재가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정 총장이 체포되고 반란을 저지 또는 진압하려는 장성들이 제압된 후에 이뤄진 것으로 이는 사후 승낙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 표기는 1996년 대법원의 전두환·노태우의 무기징역 및 징역 17년의 유죄를 판결함에 있어 주요 증거로 인용되며 신군부 반란행위 심판의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문민정부서 체포된 전두환·노태우…처벌은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1212 군사 반란의 주동자로 체포된 전두환, 노태우 등은 1심 재판에서 각각 사형, 징역 2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항소심 선고에서 전두환과 노태우는 각각 무기징역, 징역 17년으로 감형됐다.

유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김영삼 임기 말인 199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았다. 노태우는 추징금을 모두 납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학살 등 과거 행보에 대한 사과의 뜻을 전했지만, 전두환은 2021년 11월 사망하기 전까지 “난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전두환의 유해는 사망 후 2년여가 지난 오늘까지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 임시 안치돼 있다. 전두환은 “북녘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통일의 날을 맞고 싶다”는 사실상의 유언을 회고록을 통해 남겼다. 이에 유족들은 휴전선과 가까운 곳에 유해를 안장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전두환 유족 측은 최근 경기 파주시 문산읍 장산리 토지 일대를 매입해 유해를 안장하려고 했지만,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사회에서 큰 반발이 일어났다. 토지주도 지난 6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가계약 기간이 이미 끝났는데 본계약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매물을 거둬들였으며 앞으로도 팔 생각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뇌물 등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오른쪽)·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 출석한 모습. (연합뉴스)
영화 속 ‘이 장면’, 사실과 달라…역사 속 진실은

영화 속 전두광과 이태신은 광화문 앞에서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둔채 대치한다. 이태신은 자신의 예하 야포단에 경복궁 30경비단 포격을 명령하지만, 국방부 장관이 상황 종결을 명령하면서 결국 전두광의 포로가 된다.

하지만 이태신이 홀로 행주대교에서 공수부대를 막는 장면은 영화적 허구다. 실제 장태완(영화 속 이태신)은 병력 모두를 이끌고 경복궁으로 출발하기 위해 연병장에 집결하지만, 남은 몇 대의 전차마저 적 편으로 돌아설 것이란 예상이 나왔다. 여기에 노재현 국방장관이 상황 종결을 명령하면서 장태완은 수경사를 떠나지 못한 채 사무실에서 전두환 세력에 체포된다.

반란군과 진압군간의 총격 장면도 나오지만, 이날 치열한 전투는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당시 사망으로 공식 기록된 군인은 3명 뿐이다.

▲영화 ‘서울의 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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