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칼럼] 아빠의 ‘여친’, 엄마의 ‘남친’, 그리고 새로운 관계들

입력 2023-11-1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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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희 수원지방·가정법원 안산지원 부장판사 칼럼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면접교섭 청구 사건의 상대방이었던 은영씨에 대한 첫 인상은 ‘좋은 엄마가 되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3살 아들 지수와 5살 딸 지연이가 있었는데, 그 어린 아이들 둘을 혼자 키우며 직장을 다녀 번 돈을 거의 아이들에게만 쏟아 부었죠. 아이들 먹거리에 세심히 신경 쓰는 것은 물론,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좋다는 교재나 장난감과 책을 아낌없이 사 주었어요. 은영씨 벌이로는 어림없었지만 다행히 가까이 사는 친정부모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에 열심히 노력하며 하루하루 아이들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은영씨는 전 남편이었던 철수씨가 번번이 직장을 그만두고 몇 달씩 수입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은영씨 몰래 야금야금 빼서 쓴 대출금과 카드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 날 들통이 나자,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철수씨와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혼을 단행해 버렸던 터였어요.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철수씨가 가정에서 집안일을 나누어 하고 아이들을 잘 돌보았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철이 없다고나 할까, 철수씨가 벌이도 없이 집에 있을 때도 게임하는 시간이 대부분이었죠. 아마도 그래서 은영씨가 어린 애들이 둘이나 있었음에도 이혼 결심을 하기 쉬웠던 것 같고, 은영씨에게 면목이 없던 철수씨는 은영씨가 하자는 대로, 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주며 협의이혼에 응해 주었습니다.

그 조건은, 철수씨에게 위자료니 재산분할이니 청구하지 않을 테니, 아이들은 은영씨가 알아서 키우게 놔두고 ‘깨끗이 헤어지자’는 것이었어요. 양육비도 받지 않을 테니, ‘눈앞에 나타나지 마라’는 것이었지요. 결혼생활 동안 은영씨 말을 하나도 안 듣던 철수씨는 이혼하면서 ‘나타나지 마라’는 말은 잘 들었습니다. 한동안뿐이었지만요.

그러는 동안에 은영씨는 아이들만을 위해 열심히 살면서 아이들에게 ‘이혼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이혼은 아이들에게 ‘좋은 가정’, ‘좋은 아빠’를 주지 못하고 실패한 것이라고 여겼고 그래서 ‘꼭 좋은 아빠를 만들어 주리라’는 생각이 은영씨 마음 아래 뿌리 깊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신기하게도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고요.

은영씨 직장 동료였던 성찬씨는 성실한 사람이었는데 은영씨의 모든 사정을 알고도 오히려 아이들 키우며 열심히 사는 모습에 반했고 은영씨를 도와, 아니 은영씨와 함께 아이들 키우면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했습니다. 은영씨는 성찬씨와 금세 가까워졌고 성찬씨가 집에 드나들자 아이들에게 성찬씨를 ‘아빠’로 칭하며 지냈어요. 은영씨는 성찬씨와 결혼 생각을 했고 결혼 하고 나면 아이들 성을 성찬씨와 같은 성으로 바꾸려는 생각까지 하고 있던 참에, 그 무렵 갑자기 철수씨가 면접교섭 청구라는 것을 해 온 것이지요.

은영씨가 눈물을 훔치며 말하는 모습은 참 서러워 보였는데, 왜 열심히 살아보려는 나에게 이런 불행이 자꾸 생기는가 하는 심경으로 담당 판사인 저에게 ‘제발 판사님이 도와 주셔서 우리 애들이 좋은 아빠와 잘 살 수 있게,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들은 정말 놀라웠는데, 철수씨의 면접교섭 청구를 기각해 달라면서, ‘아이들에게 이혼으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이혼 얘기를 하지 않았고, 지금 아빠(성찬씨를 말하는 것이었어요)를 아빠로 알고 있으니 제발 그냥 이대로 살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었어요.

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이혼 얘기를 안 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아빠를 다른 사람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인지, 당시 3살이었던 지수는 혹시 잊을 수도 있다 쳐도 5살이나 되었던 지연이는 아빠 기억이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엄마가 새로 만난 성찬씨를 아빠로 알 수 있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아이들만을 위해 열심히 사는 이 엄마는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고 또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여러분 중에는, 과연 이런 황당한 사람이 있겠는가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겠지만(물론,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오죽하면 그렇게 하겠는가 생각하실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만), 가사 재판하다 보면 가끔 만나는 분들입니다. 우리 사회가 아동의 권리에 대해 집단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은영씨 같은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상당하다고 봅니다. 여기에 관련된 ‘아동의 권리’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이들은 누가 됐든 소위 ‘좋은 엄마’ 또는 ‘좋은 아빠’가 ‘제공’되어서 잘 키워 주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친부모로부터 양육 받을 권리 자체가 아동의 권리이고(아동권리협약 제7조) 이혼으로 한 쪽 부모와 별거를 하게 되더라도 아이들은 별거부모와 계속 접촉하고 관계를 유지하며 정기적으로 만날 권리가 있습니다(아동권리협약 제9조 제3항).

3살 지수, 5살 지연이 역시 위와 같은 아동의 권리가 있고, 비록 어린 아이지만 자신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서 그 연령과 발달 수준에 맞게 정보를 제공받고 알 권리, 그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 그 의견이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회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습니다(아동권리협약 제12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수와 지연이는 그들에게 관련된 사안에 관하여 아동의 최선의 이익, 즉 우리 민법 상으로는 ‘자(子)의 복리(福利)’을 최우선적으로 고려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아동권리협약 제3조, 양육에 관해서는 민법 제837조, 제843조). 은영씨가 지수, 지연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이를 위해 노력하는 열심은 온 우주에서 비견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진실 되고 큰 것이지만, 우리 사회가 이혼 자녀에 대해 어떻게 조처하는 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보니 그에 대한 올바른 정보나 지식이 없던 은영씨는 결국 사랑하는 지수, 지연이의 최선의 이익 또는 자의 복리에 반하는 비극적 결과를 낳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어디에서부터 꼬인 것일까요. 하나씩 보면서 또 관련되는 것들을 추가적으로 언급해 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로는, 이혼을 할 때 자녀가 아무리 어려도 그 연령과 발달 수준에 맞게 부모의 이혼 사실과 이혼 이후의 삶에 대해서 알려 주었어야 합니다. 즉 지수, 지연이의 눈높이에 맞게, 엄마와 아빠가 이혼으로 따로 살게 되어서 지수와 지연이는 엄마와 살지만 아빠와는 언제든(가급적 정기적으로) 만나고 연락할 수 있는 관계로 지내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었어야 하는 거죠.

따라서 둘째로, 아빠와 면접교섭을 하지 않기로 하는 양육협의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철수씨는 당연히 양육비 분담과 면접교섭, 즉 양육시간 분담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에 관한 제대로 된 양육협의를 했었어야 했죠. 이는 민법 제837조, 제843조에 명시된 법적 의무입니다. 단순한 권장 사항이 아니라 부모의 법적 의무이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에 대해 위법한 행위를 하는 것이고 자녀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혼 후에 부모들이 각각 새로운 연인관계를 맺을 수 있고 소위 ‘남친’, ‘여친’에서 애인으로, 더 나아가 재혼 배우자로 관계가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모가 이혼하면 자녀도 한쪽 부모와 마치 이혼하듯 결별하고 다시 부모가 재혼하면 자녀도 부속품처럼 그 결혼에 딸려 가는 관계가 아닙니다. 자녀도 독립된 인격체이고 권리주체로서 아동의 권리를 가지므로, 부모 자신의 혼인 및 이혼 문제와 부모-자녀 사이의 관계의 문제는 구분하고 분리해서 보아야 합니다.

이혼한 아빠의 ‘여친’이나 애인, 나아가 재혼해서 법적 아내가 되었다고 해도 그녀는 아빠의 여친이나 아내일 뿐, 자녀의 엄마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이혼한 엄마의 ‘남친’이나 애인, 재혼한 남편 역시 엄마의 애인이나 남편일 뿐, 자녀의 아빠가 아닌 것이고요. 특히 갑자기 애인을 데려와 자녀에게 소개하면서 ‘앞으로 엄마다’ 혹은 ‘앞으로 아빠가 될 거다’라고 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해로운 영향을 줄 소지가 많습니다.

즉, 넷째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혼한 부모가 애인을 자녀에게 소개할 때 주의해야 할 점들인데, 가장 우선적인 것이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진행하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연령과 발달 수준, 개별 기질이나 성격 등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자녀들이 친엄마, 친아빠가 아닌 제3자를 엄마 또는 아빠가 사귀게 되는 것 그 자체가 충격이나 놀라움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등 극심한 부정적 감정이나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지나치게 잘 보이려고 애를 쓰거나 ‘맘에 드는 착한 아이’처럼 굴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기도 한다고 하네요. 부모가 의도하거나 강제하지 않아도 말이지요. 그리고 때로는 엄마나 아빠를 빼앗겨 버린 것 같은 상실감이나 또는 그와 관련된 질투심을 갖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자녀는 친부모가 이혼으로 분리되는 것과 그 후에 각각 다른 연인관계가 생기는 것을 보는 과정 자체에서 여러 가지 마음이 들 수 있고 때론 다루기 힘든 정서 상태를 경험하게 될 수 있으므로, 부모는 이를 배려하고 살피면서 신중히 조심스레 아이들에게 애인을 소개하고, 시간을 두고 서두르지 않으면서 관계의 추이를 지켜보며 천천히 좋은 방향으로 갈 필요가 있습니다.

▲<A smart girl's guide to her parents' devorce> 와 같이 자녀의 적응을 지원하는 책들을 읽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자료 사진 촬영 : 임수희)

다섯째, 그러한 경우에도 친부와 친모의 원래 자리를 굳이 새 사람으로 대체해 주려고 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소위 ‘대체형’ 모델의 계부모 자녀 관계 내지 재혼 가족 보다는 자녀를 중심으로 동거부모든 별거부모든 그들의 새로운 파트너를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느슨하더라도 ‘연쇄·확장되는 네트워크형’ 모델 또는 ‘계속형’ 모델이 자녀로 하여금 저항이나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덜 겪게 하고 편안한 가족 관계를 맺거나 유지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부모가 신중하게 시간을 가지면서 자신의 파트너를 자녀에게 소개하고 관계를 가꾸어 갈 때, 대부분의 건강한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포함한 성인들의 결혼과 이혼, 또 그 후에도 이어지는 만남이나 헤어짐 등에 대해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성숙하게 수용할 줄 압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었더라면 가질 수 없을 인생과 현실, 인간관계에 대한 풍부한 이해와 유연한 사고도 갖출 수 있게 되는 것이고요.

은영씨의 이혼은 삶의 한 과정일 뿐 결코 실패나 자녀에게 미안해해야 할 잘못이 아닐뿐더러, 꼭 ‘정상가족’ 환타지를 채울 수 있는 형태의 가족만이 자녀에게 좋은 가정을 제공해 주는 것이라는 편향된 생각은 오히려 자녀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해로움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은영씨는 주어진 상황에서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최선의 선택을 해 왔고 자녀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며 잘 자랄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은영씨들이 자녀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좀 더 당당하고 안심하기를, 그리고 좀 더 현실에 직면하여 있는 그대로 살아 갈 수 있기를, 그럼으로써 자녀들이 질곡 없고 오히려 삶에 대한 더욱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가진 훌륭한 사람으로 잘 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임수희 부장판사는…
현재 수원지방·가정법원 안산지원에 재직 중이며 아동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면접교섭의 중요성 및 바람직한 방법을 안내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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