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팔하팔’ 문화 아시나요…‘만 나이’가 불러올 변화 [이슈크래커]

입력 2023-06-29 15:20수정 2023-08-21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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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형인가요, 친구인가요? 제가 이제 언니죠?

28일부터 연령 계산을 ‘만(滿) 나이’로 통일하는 행정기본법과 민법 개정안이 시행됐습니다. 주요 외신들도 ”한국인들의 나이가 하루 새 한두 살씩 어려졌다“며 관련 소식을 전했는데요. 이날부터 태어나자마자 1살이 되는 기존의 ‘세는 나이’가 아닌 당해 연도에서 출생 연도를 뺀 나이가 적용되며 생일이 지나면 1살, 생일이 지나지 않았다면 2살 어려지게 됩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예고된 터라 눈에 띄는 혼란은 없었지만 저학년 자녀를 둔 일부 학부모들 사이에선 혼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시행 전엔 같은 반 친구끼리 서로 형·동생으로 부를까 걱정된다는 우려가 부모들 사이에서 나왔는데요. 만 나이를 사용하면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라도 생일에 따라 나이가 달라지기 때문인데 육아카페 등에는 “같은 반 친구가 나이가 한 살 많아지는데 친구가 맞냐”는 고민을 토로하는 질문이 종종 보였습니다. 만 나이가 시행돼도 학교생활에서 달라지는 점은 없습니다. 초등학교뿐만 아니라 어린이집·유치원 입학 시기는 이미 모두 만 나이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입학 연령도 현재와 동일합니다.

이를 두고 법제처는 “처음에는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친구끼리 호칭을 다르게 쓸 필요가 없다”며 “만 나이 사용이 익숙해지면 한두 살 차이를 엄격하게 따르는 서열문화도 점점 사라지게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설명했는데요.

법제처가 언급한 ‘서열문화’, 사실 한국처럼 나이에 민감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도 희귀합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 그 사람이 몇 살인지부터 따지려는 성향이 강한데요. 한국식 서열문화의 존재 이유와 ‘만 나이’가 우리 삶에 불러올 변화를 살펴봤습니다.

▲(조현호 기자 hyunho@)
한국식 서열문화, 자리잡게 된 배경

한국에서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기 위한 첫번째 조건은 바로 ‘나이’ 입니다. 나이가 같아야 친구가 될 수 있죠. 아무리 마음이 잘 맞고 성품이 훌륭하다 해도 나이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처음부터 배제되는 것은 아쉽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어른공경 문화가 강하긴 했지만 ‘상팔하팔(上八下八)’이라는 문화 또한 공존했다는 사실 아시나요? 경북 안동 출신의 재일작가 윤학준 교수가 ‘양반’이란 책에서 언급한 말인데요. 상팔하팔은 위아래 여덟살까지 자유롭게 말을 놓고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더 큰 나이 차가 있어도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조혼 풍습이 정착된 이후 아홉살 차이가 나면 자칫 부친 또래와 친구가 되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여덟 살로 제한한 것입니다.

나이 서열 문화는 일제 강점기시대를 거치면서 변질돼 나이나 군번·학번으로 위아래를 가르는 계급문화가 대신 자리를 잡게 됐습니다. 한국식 서열문화는 전통적인 유교가 아닌 일제강점기 시대 교육제도의 잔재라는 것이죠. 군국주의 문화에 따라 상급자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기 위해 호칭을 달리했다는 것입니다.

선비의 나라였던 조선에서 학문을 중시했던 선비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학문적 소양이 뛰어나면 친구를 맺었는데요. 우정의 대명사인 오성과 한음은 5살 차이였고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의 대표격인 다산 정약용도 ‘위아래 4살 차이는 서로 비슷한 나이 또래’라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번 만 나이 실행으로 경직됐던 한국식 서열문화가 완화 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도 나옵니다. 법제처가 작년 9월 만 나이 도입을 시행하기 전에 국민신문고를 통해 실시한 여론조사(총 6394명 참여)에서도 응답자들은 ‘만 나이 통일’을 찬성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기존 한국식 나이 계산법으로 인한 서열문화 타파 기대’를 꼽았습니다. 물론 엇갈린 목소리도 존재합니다. 한 두살 차이는 친구가 될 수 있는 문화가 정착하면서 한국식 서열문화에 중장기적으로 균열이 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가 하면 나이가 아니더라도 학번이나 학년, 기수 등의 구분을 통해 한국의 서열문화가 더욱 공고히 유지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외신에 소환된 47세(?) 가수 싸이…‘만 나이’ 적용 첫날 쏟아진 외신 관심

만 나이 통일법 시행에 외신들도 속속 관련 소식을 전했습니다. 28일(현지 시각) 영국 가디언은 “모든 한국인들이 순식간에 한두살씩 젊어졌다”며 한국인들도 다른 나라 국민들과 같은 방식으로 연령을 계산하게 됐다고 보도했습니다. 매체는 한국의 ‘만 나이’ 계산법에 대해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면서도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자궁에서 보낸 시간을 나이에 반영한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0’의 개념이 없던 고대 아시아의 숫자 체계와 관련이 있다는 설도 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미국 CNN은 1977년 12월 31일생인 가수 싸이를 예로 들며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CNN은 “싸이가 만 나이로는 45세지만 연 나이로는 46세, 한국 나이로는 47세”라며 한국의 나이에 따른 위계 문화에 대해 조명했습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도 관련 소식을 보도하며 한국에서는 다른 문화와 비슷하게 나이가 높임말 사용 여부를 결정한다며 낯선 사람들에게도 ‘당신은 몇 살입니까?’라고 아무렇지 않게 묻는다며 한국의 위계질서를 언급했습니다. 매체는 “한국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처음 만났을 경우 이름보다 ‘너 몇 살이니’라고 먼저 묻기도 한다”며 만 14세인 학급 친구들이 만 13세인 같은 반 친구에게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다는 한 학생이 겪은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WSJ은 “일부 한국인은 자신의 만 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기업과 정부 기관이 만 나이 계산법을 알려주는 캠페인을 하고 있다”며 ‘나이 계산기’가 나오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만 나이 통일법 시행을 하루 앞둔 27일 오후 서울 송파구청에 법 시행 관련 안내문이 붙어 있다. 연합뉴스
‘만 나이’ 적용, 대체 무엇이 달라지나?

그렇다면 ‘만 나이’ 통일은 우리 삶의 어떤 변화를 불러올까요? 우선 ‘세는 나이’로 12살인 아이를 키우시던 분들, 아이에게 감기약을 먹일 때 혼란스럽지 않으셨나요? ‘12세 미만 20ml 복용’이라 적혀 있을 경우 12세가 만 나이를 의미하는 건지, 세는 나이나 연 나이를 의미하는 건지 헷갈리지 않으셨나요? ‘만 나이’ 기준의 나이 표시가 정착되면 의약품 용법과 용량 관련 혼란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법적 분쟁을 막을 수도 있는데요. 실제로 2014년 노사 단체협약으로 정한 임금피크제(임금정점제) 적용 연령 56세가 ‘만 55세’인지 ‘만 56세’인지를 두고 지난해 3월까지 법적 분쟁이 지속된 사례가 있습니다. 결국 대법원이 ‘만55세’로 해석했습니다. ‘만 나이’가 정착되면 이러한 법적 다툼도 잦아들 것입니다.

법제처는 브리핑을 통해 국제 표준인 만 나이로 통일해 나이 혼용으로 발생했던 사회적 비용을 크게 절감하는 효과가 예상된다고 설명했습니다. 현재까지 국내에서 쓰인 나이 계산법은 크게 세 가지였죠. 그간 ‘한국식 세는 나이’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됐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은 한 명인데 나이는 2~3개씩 되기 일쑤였죠. 만 나이 통일법 시행으로 행정 서비스나 각종 계약 체결 과정에서 세 가지 나이 때문에 생기는 혼선과 분쟁, 불필요한 사회·경제적 비용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는 국제 기준에도 부합하는 만큼 정부는 혼선 최소화를 위해 대국민 홍보와 소통 강화에 힘써야 합니다.

물론 만 나이 통일에도 연 나이 적용 예외가 있습니다. 술과 담배에 대한 구매 제한 연령은 현행 청소년보호법대로 연 나이가 적용된 19세 미만 청소년으로 규정합니다. 이 외에도 취학연령, 병역 의무 연령, 공무원 시험 응시 연령 등이 그 대상입니다. 통상 나이가 어릴수록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취업, 결혼 시장에 뛰어든 이들도 만 나이 사용을 반가워하면서도 당장 통용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는 반응인데요.

지금까지 사회적 관습이었던 ‘세는나이’가 적용되지 않아 한동안의 혼란 발생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되는 점도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취학 연령엔 만 나이를 적용하지 않아 학급 내 나이가 달라져 호칭 관련 혼선을 빚을 수 있는 점, 환갑과 달리 칠순, 팔순은 한국식 나이로 지냈다는 점 등이 꼽히는데요. 만 나이 사용 문화의 신속한 정착을 위해 정부의 지속적인 교육·홍보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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