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경제 사령탑의 ‘라면값’ 언급이 씁쓸한 이유

입력 2023-06-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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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어제 라면값을 거론했다.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경제정책 전반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기업들이 적정하게 내리는 것이 정답이란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다. 추 부총리는 국가 경제를 이끄는 경제 사령탑이다. 생필품 가격의 오름세가 반가울 까닭이 없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제 발언이 적절했는지 의문이다.

추 부총리는 라면값의 적정성 문제가 지적되자 “지난해 9~10월에 (기업들이 라면값을) 많이 인상했는데 현재 국제 밀 가격이 그때보다 50% 안팎 내렸다. 기업들이 밀 가격 내린 부분에 맞춰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정부가 하나하나 원가를 조사하고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면서 “이 문제는 소비자 단체가 압력을 행사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어제 언급은 다 사실관계에 부합한다. 추 부총리는 ‘관치’를 경계하기도 했다. 이 또한 올바른 인식이다. 그러나 추 부총리는 결국, ‘소비자단체의 압력’까지 들면서 출고가격 인하를 우회적으로 요청하는 모양새를 빚어냈다.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해당 기업 관계자를 정부청사로 불러 가격 인하를 압박하는 것만을 관치로 아는 것인가.

시장경제 원칙을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가 시장가격에 개입하는 것은 저간의 속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여간 큰 모순이 아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이 2월 “은행은 공공재적 성격이 있다”는 발언을 한 것을 신호로 당국자들은 금융·통신·정유 등에 개입했다. 심지어 소주, 맥주, 생수 가격까지 좌우했다. 이런 물줄기 끝자락에 어제 라면값 언급이 있다. 추 부총리의 진의와 관계없이 곱게 보기 힘든 이유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 당시 자유를 35번 언급했다. 자유의 확대가 “번영과 풍요, 경제적 성장”의 원천이란 요지의 언급도 했다. 라면을 비롯한 생필품을 생산하는 기업 관계자들은 정부 눈치를 살피면서 가격을 책정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부의 시장개입은 부작용을 키우게 마련이다. 전임 문재인 정부가 무리하게 짓누른 전기·가스 가격이 오늘날 어떤 재앙적 결과를 초래하는지만 봐도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 판단이 쉽지 않은가. 정부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가리는 혜안과 결단이 필요하다.

정부 차원에서 지금 급한 것은 라면값 잡기 따위가 아니다. 초저금리와 적자재정 등의 여파로 잔뜩 부푼 거품을 어찌 효율적으로 빼느냐가 사활적 관건이다. 정부, 가계, 기업이 모두 빚에 허덕이는 난국을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최우선으로 구조개혁에 초점을 둬야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얼마 전 “재정과 통화의 단기 정책을 통해 해결하려 하면 나라가 망가지는 지름길”이라며 구조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나. 경제 사령탑은 라면값도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문제에 대한 청사진을 펼쳐 보이는 대신 라면값만 주목한다면 국민은 혀를 차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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