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뒷마당 사수’에 애먹는 미국

입력 2023-06-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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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남미서 美 리더십 과시

2000년대 中 부상하며 질서 재편

잇단 脫美 움직임에 대응 주목돼

‘미국의 뒷마당’이라는 표현이 있다. 1823년 미국이 ‘먼로 독트린’을 통해 역외세력의 서반구 개입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래 줄곧 미국의 세력권 아래 있었던 중남미를 일컫는 말이다. 이후 20세기 초반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외정책은 미국이 패권국으로서 갖는 입지를 다졌고, 이후 1947년 리우 조약 체결, 1948년 미주기구 결성, 1959년 미주개발은행 설립으로 미국 주도의 역내 질서는 더욱 강화됐다.

20세기 미국은 압도적인 경제적·군사적 우위를 토대로 중남미 국가의 내정에 깊숙이 관여하며 서반구에서 자국의 대외정책 목표를 실현하고자 했다. 냉전 기간 공산주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쿠데타를 사주하고, 군부 정권을 지원했다. 1973년 칠레의 아옌데 사회주의 정권의 붕괴와 피노체트 군부정권의 등장 배경에 미국의 물밑 작업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군사적 개입이나 침공도 서슴지 않았다. 1961년 쿠바에서 반공 게릴라 세력의 정권 침탈 작전을 지원하는가 하면, 1989년에는 파나마를 침공해 노리에가 정권을 직접 붕괴시키기도 했다.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인한 냉전 종식으로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가 시작되자, 많은 전문가는 미국이 자국의 ‘뒷마당’에서 더욱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했다. 실제로 미국은 세계화 확산 국면이 한창이던 1994년 서반구의 정상들을 한데 모으는 제1차 미주정상회의를 개최하며 리더십을 과시했다. 민주주의와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역내 질서 실현에 대한 미국의 의지 표현이었다.

1990년대 중남미 국가 대부분은 민주주의로 이행하고 신자유주의에 충실한 경제 발전 전략을 택했다. 미국의 구상대로였다. 미국, 캐나다, 멕시코가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은 역내 질서가 미국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러 중남미 국가가 ‘형님’ 말을 잘 듣는 ‘아우’가 되자, 역설적으로 미국의 대(對)중남미 정책 방향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원하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확산하며 미국의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사안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2001년 9·11 테러라는 전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미국 대외정책의 초점은 반테러와 중동으로 급격히 이동했고, 안 그래도 미국의 대외정책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밀려나던 중남미는 ‘테러와의 전쟁’ 국면에서 더욱 뒷전으로 밀려났다. 미국의 대중남미 정책 방향이 모호해지던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이 등장한 것이다. 중남미 국가는 새로운 현실에 빠르게 적응했다. 서반구에서 미국과의 ‘형님-아우’ 관계를 재설정할 수 있는 기회를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남미 국가의 외교 다각화 노력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중국, EU, 러시아 등 새로운 역외세력과의 관계가 개선됐고, 미국을 배제하는 지역공동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특히 중국과의 경제적·외교적 상호의존성은 놀라운 속도로 높아졌으며, 중국은 미국이 중남미에서 남겨 놓은 리더십 공백을 서서히 메우는 유력한 역외세력으로 떠올랐다.

이 무렵부터 중남미에서 역내 당면 사안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원하는 정책 결과를 얻어내던 패권국으로서의 미국의 입지가 흔들리게 됐다. 200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여러 중남미 국가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승인하는 결의안에 반대한 데서 예전 같지 않은 미국의 영향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역내 지정학적 환경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와 오바마 행정부는 미주 지역의 지정학적 구도 변화를 대부분 수용했다.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중남미의 당면 과제보다는 중동에서의 안보 위협, 글로벌 금융위기 대응, 아시아 중시 정책이 우선시됐기 때문이다. 이후 들어선 트럼프 행정부는 자국우선주의에 기반한 대외정책으로 안 그래도 악화하던 미국의 역내 리더십에 더욱 금을 냈다. 반면 중국은 무역 관계를 지렛대 삼아 투자나 차관 같은 경제적 수단과 정상외교를 통해 꾸준히 중남미에서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재작년 출범한 바이든 행정부는 ‘뒷마당 사수’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중국의 도전에 맞서 중남미 국가와의 관계 개선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년 6월 미국에서 개최된 제9차 미주정상회의에서 발생한 불협화음과 일부 중남미 정상의 보이콧은 양측의 ‘형님-아우’ 관계에 이미 큰 균열이 생겼음을 보여줬다. 예전과는 다른 ‘아우’의 태도, 중국이라는 새로운 ‘형님’의 등장 속에서 미국의 ‘뒷마당 사수 작전’에 획기적인 ‘한 방’이 절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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