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상담소] 너무 늦게 도착한 진심

입력 2023-05-18 05:00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장·임상사회사업가

“남편이 술을 마시면 조금 과하게 말하고 행동해요.”

“아내 때문에 제 모든 인간 관계가 망가졌어요.”

아내가 부부 상담을 신청했다고 한다. 결혼한 지 2년 남짓 됐다고 하니, 아직 신혼일 텐데…. 날마다 깨소금을 볶아도 시원찮은데, 대체 무슨 사연이 있어서 상담을 신청했는지 물었다. 아내는 어두운 얼굴로 술 문제라고 말했다.

‘조금 과하게 말하고 행동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과음한 날엔 집에 와서 옷을 벗는단다. 완전히 발가벗고 빌라 3층 베란다에 매달린단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단다. 동네 창피해서 함께 살 수가 없단다.

이제는 남편 이야기를 들을 차례. 남편은 솔직히 한두 번 베란다에 매달린 적이 있다고 인정한다. 한밤중에 경찰까지 출동해서 상황이 커진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술 마신다고 늘 그렇게 과하게 행동하진 않는다고 항변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중요하단다. 아내가 음주를 싫어해서 남편이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남편 휴대전화를 열어서 함께 술을 먹었을 법한 남편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욕을 한단다. 그렇게 30여 명에게 욕을 했단다.

아내는 옆에서 남편 말을 듣다가 내가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겠냐고 발끈한다. 네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될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당연히 남편도 가만히 있진 않는다. 그러니까 네가 ‘미친X’ 소리를 듣는 거라며 역시 목소리를 높인다.

부부는 상담자 역할을 많이 오해한다. 서로 말이 안 통하는 부분을 상담자가 중간에서 공정한 태도로 풀어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상담자는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다. 선생님처럼 개입해서 잘못을 따질 순 없다. 협상을 도와줄 뿐이다.

그러므로 서로 극단적으로 행동하면서 무조건 상대방 탓을 하는 부부 사이에는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매우 적다. 특히 이 부부 경우에는 이미 관계가 파탄날 대로 파탄난 상태. 말하자면, 지나치게 늦게 부부 상담 장면에 나오셨다.

부부를 따로 만나 보기도 했다. 상대를 향한 진심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약해서 이미 죽어버린 줄기를 되살리기는 어려워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다. 대단히 안타까웠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진심을 살리진 못했다.

(※위 사례는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서, 각색한 내용입니다.)

이재원 강점관점실천연구소장·임상사회사업가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