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아 과학칼럼니스트
필자의 가족은 집 근처 공원에 가면 늘 농구장을 찾는다. 농구공도 없고, 농구를 즐겨 하는 사람도 없다. 아이가 농구를 할 만큼 자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동네 10대 청소년들이 삼삼오오 모여 신나게 농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관람한다. 공을 통통통 튀기며 서로 기회를 엿보다가 불쑥 솟구쳐 올라 저 멀리 골대 공을 던져 넣는 것이 무척 재미있다.
농구 규칙을 모르는 필자의 아이는 관심이 다른 데에 있다. 서너 살 아이의 눈에는 키 큰 형들이 멋지게 보이나 보다. 언제쯤 나도 저렇게 키가 자랄 수 있을까 궁금해 하는 아이에게 필자는 늘 “밥도 잘 먹고 고기도 잘 먹고 신나게 뛰어놀아야지. 그러면 저 형아들처럼 키 크고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말해준다.
가끔은 필자가 보기에도 키가 훤칠해 언뜻 성인처럼 보이는 청소년도 있다. 아이도 “우와, 저 형아는 키가 진짜 크고 멋있다”며 감탄한다. 필자는 이때도 역시 밥과 고기를 잘 먹으면 저렇게 큰 형이 될 수 있다고 말해준다.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든다. 밥과 고기를 잘 먹어도 최종 키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키는 태어나기 전부터 유전자가 이미 결정해놓았을 거라고 말이다. 안타깝게도 필자나 배우자는 둘 다 키가 큰 편이 아니라서 아이 역시 저 형처럼 감탄이 나올 만큼 키가 자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최근 美서 성장 유전자 찾아내
유전적인 요인이 키 성장을 크게 좌우한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적으로 안다. 그간 과학자들은 키 성장과 관련 있는 유전자를 찾기 위한 연구를 해왔다. 지난해에는 호주 과학자들이 540만 명의 유전정보를 비교 분석해 키와 관련 있는 유전적 변이 1만2111개를 찾았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유전자가 키 성장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 미국 과학자들이 ‘뼈가 자라는 곳’인 성장판에서 키 성장 관련 유전자들을 찾아냈다. 성장판에서 뼈가 자라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를 찾아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성장판은 팔다리와 손가락, 발가락 등 뼈의 끝부분에 있는 연골이다. 뼈세포보다 상대적으로 무른 연골세포들이 증식하고 있다. 성장을 촉진하는 호르몬이 분비되면 연골세포들이 세포분열을 멈추고 성숙하면서 단단해진다. 이렇게 뼈의 새로운 부분이 된다. 성장기 동안에는 이것이 반복되며 뼈의 길이와 굵기가 자란다. 하지만 성장기가 지나면 연골세포가 더 이상 증식하지 않아 뼈도 자라지 않는다. 즉 성장판이 닫힌다.
하버드대 의대 소아내분비학과와 유전학과 등 공동연구팀은 쥐의 성장판 연골세포 6억 개에 있는 유전자들을 스크리닝했다. 특정 유전자를 하나씩 없애면서 이들 유전자 중 연골세포가 증식하고 성숙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찾은 것이다. 그 다음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진 유전정보와 비교했다. 사람의 유전자를 하나씩 없애면서 키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 실험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같은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심야시간 ‘꿀잠’… 성장호르몬 ‘왕성’
그 결과 연구팀은 키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전자 145개를 찾아냈다. 이들 유전자가 없거나 특별한 이유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경우 키가 잘 자라지 않는다. 연구팀은 또한 이들 유전자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최종 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연구 결과는 지난달 14일 국제학술지 ‘셀 지노믹스’에 실렸다.
하지만 부모의 키가 작다고 해서 자녀의 키를 일찍부터 포기할 필요는 없다. 키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유전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키 성장에서 유전적인 요인이 약 80%, 환경적인 요인이 약 20% 정도 된다고 보고 있다. 키가 쑥쑥 크려면 음식을 골고루 먹고 날마다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무엇보다도 성장호르몬이 나오는 시간인 밤 10시~새벽 2시에 ‘꿀잠’자라고 조언하는 이유다. 키 크는 환경만 잘 만들어져도 유전자가 생각해둔 것보다 몇 센티미터는 훌쩍 자랄 것이다. 참고자료 | 논문 Genome-wide CRISPR screening of chondrocyte maturation newly implicates genes in skeletal growth and height-associated GWAS loci. Cell Genomics 2023년 4월 1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