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놀이터] 티렉스의 입술

입력 2023-04-1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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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며칠 전 씁쓸한 뉴스를 접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육식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이하 티렉스)의 화석이 조만간 경매에 오를 예정이라 관련 연구자들이 크게 실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티렉스처럼 인기가 많은 공룡 화석의 값이 걷잡을 수 없이 올라 웬만한 박물관의 예산으로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 화석만 봐도 2008~2013년 미국에서 발굴한 티렉스 세 마리의 불완전한 화석을 짜깁기한 것임에도(그래서 이름이 ‘트리니티(Trinity, 삼위일체)다) 경매가가 600만~800만 스위스프랑(약 90억~120억 원)으로 예상된다.

영화 ‘쥬라기 공원’으로 몸값 급등

1997년 처음 경매에 오른 티렉스 ‘수’는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화석임에도 미국 필드자연사박물관이 840만 달러(약 110억 원)에 낙찰받았다. 그러나 2020년 두 번째로 경매에 오른 티렉스 ‘스탠’은 무려 3180만 달러(약 400억 원)에 개인 소장가가 사들였고, 지금은 행방이 묘연해져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새로운 화석을 보고도 연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공룡학자들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다.

티렉스는 예전부터 가장 인기 있는 공룡이었지만 이처럼 몸값이 급등하게 된 계기는 30년 전인 1993년 개봉된 영화 ‘쥬라기 공원’이 아닐까. 거대한 티렉스가 파충류 특유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눈빛으로 차량 안의 사람들을 공격하는 장면은 너무 실감이 나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당시 제작자들은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실제 크기의 정교한 모형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세와 행동에도 최신 연구 결과를 반영했다. 특히 알파벳 ‘T’처럼 뒷다리로 서고 머리와 등, 꼬리 높이가 거의 같은 불안한 자세는 티렉스를 더욱 공격적인 동물로 느껴지게 했다.

티렉스 화석은 20세기 초 미국에서 처음 발굴됐는데, 1915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된 티렉스는 캥거루처럼 뒷발과 꼬리로 땅을 짚고 서 있는 안정적인 자세였다. 그러다 보니 키가 컸고 머리가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져 두려움이 희석됐다. 그런데 그 뒤 많은 티렉스 화석이 발굴되고 연구가 진행되면서 자세가 틀렸다는 게 밝혀졌다. 결국 1915년부터 전시돼온 화석은 1990년 해체돼 T자형 자세로 재조립됐고 영화에도 반영된 것이다.

▲티렉스의 머리뼈 화석만으로는 얼굴 생김새를 정확히 알 수 없다(위). 지금까지는 입을 다물었을 때 악어처럼 윗니가 밖으로 드러나는 생김새로 묘사해왔지만(가운데), 최근 이빨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도마뱀처럼 이빨이 피부조직(입술)에 덮였을 것으로 보인다(아래). (제공 ‘사이언스’)

악어보다 도마뱀에 가까운 입 모양

최근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티렉스의 얼굴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티렉스가 입을 다문 상태에서는 오늘날 도마뱀처럼 이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반면 우리에게 익숙한 티렉스의 얼굴은 악어처럼 입을 다물어도 커다란 윗니들이 입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공동연구자들은 치아 법랑질의 특성에 주목했다. 치아가 늘 공기에 노출되면 법랑질의 수분이 날아가 마르면서 깨지기 쉽다. 악어는 많은 시간을 물속에서 지내는 데다 이빨의 법랑질도 두껍다. 그렇다면 육상동물인 티렉스의 이빨은 법랑질이 악어보다도 더 두꺼워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티렉스와 가까운 종류인 육식 공룡의 이빨 화석을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법랑질의 두께가 오히려 더 얇았다. 흥미롭게도 오늘날 가장 큰 도마뱀인 코모도왕도마뱀도 법랑질의 두께가 얇다. 물론 입을 다물 때는 우리의 입술에 해당하는 부드러운 피부조직이 이빨을 덮고 있어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티렉스의 입을 악어처럼 묘사한 건 엄청난 이빨의 크기 때문이다. 티렉스의 이빨 길이는 30㎝에 이르고 잇몸 밖으로 드러난 부분만 쳐도 15㎝나 된다. 따라서 입을 다물어도 윗니가 밖으로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실제 머리뼈의 길이와 이빨 길이의 상대적인 비율을 측정한 결과 티렉스와 도마뱀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 도마뱀처럼 이빨을 덮는 부드러운 피부조직이 있어도 해부학적으로 무리가 없다는 말이다.

논문에는 머리뼈 화석을 바탕으로 만든 티렉스의 머리 옆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윗니가 드러난 기존 머리에 비해 입술에 덮여 이빨이 보이지 않는 머리가 확실히 덜 무서워 보인다. 만일 이런 연구 결과가 훨씬 이전에 나와 영화 ‘쥬라기 공원’을 만들 때 충실하게 반영됐다면 그처럼 강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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