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
ASPI의 보고서는 경제, 사회, 보건, 환경, 국방의 기반이 되는 44개 기술 영역을 선정하고 각 영역에서 발간된 논문의 영향력을 기준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를 종합적으로 보면 중국이 1위, 미국이 2위, 영국과 인도가 3위, 한국과 독일이 4위에 위치했다. 중국의 연구 저변 확대의 기세가 대단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보고서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뛰어난 연구 결과가 언제나 실제 제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중국의 능력을 과장할 필요도 없다. ‘종이접기 기술이 뛰어나도 종이가 없으면 무용지물’인 것처럼, 아무리 연구가 뛰어나도 그것을 실재화(實在化)할 수 있는 역량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일이다. 아마도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최근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 강화 조치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의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실재화 역량 확보를 차단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오히려 경제안보 분야에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이슈는 중국의 경제적 강압(economic coercion)이다. 중국은 오랫동안 경제적 외교술을 사용해 왔으며, 최근 10년 동안 외교 정책의 도구로 강압적인 경제 조치를 점점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강압적 조치는 사용 빈도뿐만 아니라 범위도 진화하고 있으며, 중국의 자신감이 높아짐에 따라 강압 수단도 확대되고 있다.
최근 참석했던 경제안보 관련 회의에서 한 전문가는 작년 한 해 우리를 가장 힘들게 했던 국가는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최근에도 세부 가이드라인 이슈로 치열하게 논의되고 있는 반도체법(CHIPS Act),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라는 시각이다. 미국도 특정 목적을 위해 경제를 동맹국 압박에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 이견을 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강압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투명성과 합법성이다. 미국은 법률에 근거하여 우려 분야를 대상으로 경제제재 등을 취한다. 반면, 중국은 일반적으로 비공식 또는 비법률적 수단을 사용하여 강압적인 경제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또한 문제가 발생한 영역이 아닌, 중국의 피해는 최소화하면서도 상대국에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문을 전략적으로 표적 삼아 압박을 가한다. 아마도 예측 불가능한 조치를 통해 상대국의 두려움을 극대화하는 전략일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대표적인 수단은 수출입 제한, 불매운동, 중국인 관광객 제한, 투자 제한, 특정 기업에 대한 비공식적 압박 등이다. 사드(THAAD) 사태 이후 우리는 이를 경험했고, 최근 호주는 코로나19 진원지 조사를 두고, 리투아니아는 대만 대표부 이슈로 비슷한 중국의 경제적 강압을 경험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중국 정부는 이를 모두 부인했다는 점이다. 스스로가 비공식적인 조치를 활용하고 있음을 시인한 셈이다.
중국이 글로벌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아지고 글로벌 공급망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중국의 경제적 강압에 대한 공동 대응의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특히 2010년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이슈로 중국산 희토류 수출통제 보복을 경험한 일본이 적극적이다.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릴 G7 회의의 의제 중 하나로 기시다 총리가 경제적 강압을 다룰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2주 전 필자가 패널로 참석했던 미국 워싱턴DC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경제안보 콘퍼런스에서 멜라니 하트(Melanie Hart) 미 국무차관 중국정책 자문은 “미국이 경제적 강압에 직면한 동맹국과 우방국들에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장담은 못하겠지만, 언제든지 고민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언했다. 언뜻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구체적인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리투아니아가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보복을 당할 때 유럽연합(EU)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공동대응하는 것을 보았다. 현재 양자 관계를 제외하고 한국은 공동대응의 확립된 기제가 없는 상황이다. 예를 들어, 쿼드(QUAD) 참여국인 일본이나 호주와 달리 우리는 그만큼 취약성에 노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제적 보복을 과도하게 우려할 필요도 없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경제적 강압 논의에 참여하고 준비해서 나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