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석 보령 신제일병원장
다급한 간호사의 콜, 응급상황이다. 50대 남자 환자는 의식도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다.
“기도를 확보하고, 모니터링은? 중심정맥관을 잡을 테니 준비해 주세요.”
얼마간의 긴박했던 순간이 지나고 다행히 환자는 의식과 혈압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여러 정밀검사를 진행했지만, 저혈압의 원인을 명확히 찾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퇴원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회진 중 갑자기 들려온 시끄러운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바로 그 환자의 병실이었다.
“제 보물 상자를 이렇게 망가뜨리면 어떡해요. 그리고 제대로 사과도 안 하시면….”
위험했던 환자와 옆 침상의 환자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병실 바닥엔 플라스틱 수납 상자가 떨어진 채였고 주변엔 수많은 종류의 알약이 흩어져 있었다.
“아니 무슨 약을 이렇게 많이 드세요?”
간호사의 질문에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던 남자는 이곳저곳 귀동냥과 TV에서 들은 좋다는 약을 구해 먹다 보니, 어느새 한 주먹 정도의 양이 되었다고 했다. 자세히 살피니 그중엔 혈압을 낮추는 약도 보였다. 그제야 왜 환자분이 위중한 상태까지 갔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결국 약을 정리해 꼭 필요한 것만 골라냈더니, 채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인간의 노화에는 질병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그에 따른 여러 가지 약물 복용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고. 하지만 다양한 약을 복용하다 보면 중복된 약들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하거나 남자 환자처럼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게다가 몸에 좋다고 성분조차 확인 안 된 약까지 추가하면 그 위험성은 훨씬 높아지게 마련이다. 여러 약을 드시는 환자분 중 간혹 어지러움, 입 마름, 위장장애 등을 호소하시는 분이 있는데 이땐 약을 더하기보단 성분이 비슷한 약이 있는지 확인해서 빼주면 오히려 말끔히 좋아지는 경우도 많다.
어찌 보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새해가 되면 누구나 이루고 싶고 배우고 싶은, 또는 고쳤으면 하는 것들을 위해 계획을 세우곤 한다. 하지만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배우고 싶어 더 하다 보면 어느새 무슨 계획을 세웠는지조차 모를 경우도 있다. 게다가 작심삼일이라고, 세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자괴감이나 자책도 만만치 않다.
설이 지났다. 2023년 신년 아침 세운 계획이 잘 지켜졌나 확인하는 대신 차라리 비워 보는 건 어떨지? 지금까지 실행하지 못한 계획, 아쉬워 버리지 못한 것들, 그리고 놓지 못한 인연들을 과감히 정리하는, 더하기보단 빼는 한 해를 살아보자. 어쩌면 더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쌓였던 힘든 문제들이 빼면서 오히려 홀가분해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글을 정리하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니 진료실에도 언제부턴가 쌓여온 먼지 묻은 책들과 잡동사니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눈에 보이는 이것들부터 치워봐야겠다.박관석 보령 신제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