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민] 개발·협력에 담긴 이데올로기

입력 2023-01-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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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진 미국 럿거스 뉴저지주립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최근 국제개발협력이나 인도주의적 지원은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 도출된 증거에 기반한 기술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다. 마치 기술, 즉 테크놀로지(technology)가 이념, 즉 이데올로기(ideology)를 이끄는 형상이다. 하지만 정말 정치색과 국제관계의 역학을 뺀 중립적이고 과학적이고 보편적인 개발이념과 논리가 존재할 수 있을까.

2007년 필자가 하버드대학에 유학하던 때,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가 케네디스쿨에 방문해 연설을 하였다. 이때 필자는 유엔(UN)의 새천년개발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지 물었다. 박근혜 후보는 대답했다.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나누겠다고. 몇 년이 흘러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이 말은 사실로 실현되었다. 미얀마라는 국가에서 5년간 2200만 달러의 사업으로. 이 하향식 예산은 2013년 말 새해가 되기 전 신속히 통과되고 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집행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필자는 이 사업의 디자인과 평가틀 작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필자는 기술적인 영향평가의 기반을 만들었는데, 이와 별개로 한국 개발독재의 유산인 새마을운동이 어떻게 미얀마 농촌개발사업으로 재탄생하는지 연구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은행이 비슷한 시기 시작한 미얀마 종합농촌개발사업 역시 서구의 개발이론을 반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시아의 마지막 보석’이라고 할 정도로 발전 잠재력이 컸던 미얀마에 마치 동양과 서양이 진출하여 협력국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이념 경쟁을 하는 듯했다.

두 사업은 각 마을에 보조금을 교부하고 마을별 개발위원회가 능동적으로 개발사업을 계획, 집행하는 비슷한 양식을 따랐다. 그러나 사업의 논리로 새마을운동은 개발국가론을, 세계은행의 마을주도개발(Community-driven development, CDD) 사업은 수정된 신자유주의를 반영하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에서의 개발국가론은 중앙정부가 빠르게 경제성장을 주도하여 가시적 경제성장과 안보를 달성하고 이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비슷하게 미얀마에서 실시 됐던 새마을운동 사업은 농촌개발부의 지방 사무소 공무원을 활용하고 마을 간의 경쟁을 통해 성과를 높이며, 소득창출과 금융지원 등 경제 분야를 강조한다. 반면 수정된 신자유주의는 시장 중심의 정책을 강조하고 정부는 민간이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구축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세계은행의 CCD 사업은 민간인 활동가(facilitator)들이 마을별로 지역사업 운용을 촉진하고, 여성 등 사회적 약자의 참여를 통해 정당성을 확보하며, 소규모 인프라 사업과 사회 분야 사업에 초점을 둔다. 사업 종료 후 데이터에 기반한 경험적 평가와는 별개로, 두 사업의 변화이론은 공여국의 개발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개발(development)이란 개인의 경제적 자유와 집단적인 정치적 권리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이상적인 제도(institution)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업시대 이전에는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고 시장은 사회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 이후에는 개인의 정치적 자유 추구와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사회 공동체적 권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이는 전체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경제적 민족주의(Economic Nationalism) 이념에서 강조된다. 한편 시장은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며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자유방임주의 등의 이념에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다양한 이념들은 주요 가정, 개발 주체, 가치에 따라 정책 처방을 달리한다. 예를 들어 인간의 본성은 이타적이라는 가정하에 국가 주도로 형평성을 추구하기 위한 선제·보편적인 복지를 펼칠 것인지, 아니면 인간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적 주체라는 가정하에 시장 효용을 극대화하고 정부 역할을 최소로 할 것인지 이념에 따라 정책이 다를 것이다. 국가 구성원들의 합의에 따라 다양한 개발이념의 조합이 채택되기에 국제사회는 다양한 정치경제 체제를 경험하게 된다. 최근 코로나19라는 같은 시기의 같은 위기에 대처하는 각국 정부의 모습이 체제의 차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개발 체제와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은 지역적 유사성을 보이기도 하고 국제적 추세에 수렴해 가기도 하며,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변하며 후발주자들에게 전할 개발 모델을 형성해 왔다.

한국에서는 ‘한국형 개발협력’ 모델이 우리의 독특한 발전 경험과 정책을 공유하며 원조의 비교우위를 살리는 노력의 일환으로 쓰여져 왔다. 물론 이러한 개발경험 공유는 공여국의 연성권력(Softpower)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도 있고 개도국의 주인의식을 약화할 수도 있으며, 공여국과 다른 개발 유산을 가진 나라에 적용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와 식민지 통치를 통해 국제관계를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게 만든 장본인인 서구 유럽이 신흥국들에 일괄적으로 작은 정부와 개방을 처방하며 성장의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과 비교하면, 한국과 같은 개도국이었던 나라의 접근이 보다 현실적이고 경험에 근거한 대안을 제시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2023년 현재 국제적, 국내적 개발 기조는 무엇이고, 이것이 개발이론과 국제협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코로나 이후 세계는 각국 정부의 부양정책과 봉쇄에 따른 수요 왜곡 및 공급망 혼란, 전쟁과 에너지 부족이 맞물려 일으키는 물가상승, 불확실한 보건 및 기후변화의 위기를 안고 있다. 이에 따라 세계는 자국의 이해를 우선으로 적극적인 정부를 강조하는 신케인즈주의와 경제적 민족주의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선봉에 있었던 미국을 중심으로 공급 중심의 통화정책으로부터 수요 중심의 재정정책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Nation state)가 다국적기업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정책수단을 차단했던 신자유주의와는 차별화되게 경제안정과 불평등 해소를 위해 다국적기업에 대한 증세 기반도 확충하고 있다. 지나치게 낮은 금리에 기댄 부채 주도 성장은 낙수효과보다는 불평등을 확산시켰고, 실물경제보다는 금융경제를 키우고, 소득보다 자산의 증가 속도를 늘렸다는 비판적 인식 때문이다. 이는 풍부한 고용 기회를 통해 일하고 저축하여 차근차근 자산을 축적해 가는 정석을 낡은 규칙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국 정부는 오히려 이러한 국제 기조 속에서 다소 독특한 길을 가고 있다. 재정정책과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한 세금이 필요함에도 낙수효과 논리와 법인세 감축을 꺼내고 있다. 또한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불인정(예를 들어 성평등은 개인의 문제라는 발언), 장애인, 여성, 노동자 등 비기득권층의 권익 추구에 대한 비판적 시각, 관치금융을 통해 이자를 낮추고 또다시 부채를 통한 자산 매입을 촉진하는 상황, 기존에도 낮은 보유세를 더 낮춘다는 측면에서는 신자본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펼치고 있다. 동시에 약자 복지(따라서 선별적 복지)와 보편적 복지라는 다소 모순적인 수사학을 보인다. 정치적으로는 정권 비판 세력에 대한 검찰의 선별적 기소, 입법·행정·사법의 불균형, 언론의 다원성 약화 등 중앙집권적, 권위주의적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이는 현 정부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에 방점이 있는 것임을 분명케 한다. 대외적 측면에서 다른 나라의 보수세력과 경제적 민족주의는 자국민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앞세우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친화를 북한과는 대립을 강조하는 것도 외세와의 관계로 안보를 강화하고 그를 통해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독특한 모습이다. 신자유주의, 권위주의, 반북/친미·친일의 특이한 조합이 2023년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하며 우리 고유의 길을 제시할지, 그리하여 다른 개도국에 독특한 개발 경험으로 나누어질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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