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
사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의 원래 명칭은 ‘더 나은 재건 법안(Build Back Better Act, BBB 법안)’이다. 지난해 9월 발의된 후 11월 하원을 통과했다. 이후 상원에서 축소·수정작업을 거쳐 2022년 8월 7일 ‘인플레이션 감축법’으로 통과되었고, 16일 바이든 대통령 서명 이후 즉시 발효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입법과정에서 법안의 명칭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집권 민주당으로서는 다분히 국내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1월 8일 열릴 중간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정부의 지지율이 역대 최저인 30%대에 머물자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인플레이션 감축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IRA가 2011년 제정된 예산통제법(Budget Control Act)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재정적자 감축 법안이라는 점에서 재정적자 감축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사실 IRA의 핵심 내용은 기후 변화 및 에너지 안보와 관련된 3690억 달러에 달하는 세금 및 기타 인센티브다. 특히 신재생에너지와 관련된 산업에 대한 투자 지원 확대는 중국의 관련 산업을 견제하고 미국 및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 중심으로 관련 공급망을 재편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또한 친환경 경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수백만 개의 미국 제조업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심산이다.
예를 들어, IRA는 2009년부터 제공하던 전기차에 대한 기존 최대 7500달러 세액 공제 부여 기간을 연장하고 그 조건을 수정하고 있다. 수정된 세액 공제 부여 조건은 (1)북미에서 최종 조립 (2)미국 또는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국가에서 생산하거나 북미에서 재활용한 특정 비율의 배터리 핵심 광물 사용 (3)북미에서 제조된 배터리 부품의 특정 비율 사용이다. 또한, 중국 및 러시아와 같은 우려 국가에서 공급되는 ‘어떠한’ 핵심 광물(2025년 1월부터)이나 부품(2024년 1월부터)이 포함되는 경우 해당 차량을 세액 공제 대상에서 제외한다. 이러한 변화는 전기차 및 배터리 글로벌 공급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배터리 관련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문제는 당장 북미 최종 조립 요건이 우리 자동차 업계에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일단 북미 최종 조립 조건에 대한 내용은 한 달 전인 7월 27일 이 법안을 발의한 미 상원 민주당 홈페이지에 공개된 내용에서 최초 확인된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8월 3일 상원에 이 법안이 올랐을 때까지도 최종 조립 조건에는 2026년 12월 31일까지 유예기간이 설정되어 있었다. 비로소 8월 7일 수정안이 상원에서 통과되며 유예기간 없는 최종 조립 조건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 기업이나 정부로서는 행동에 나설 시간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국 의회로 하여금 최종 조립 조건의 유예기간을 갑자기 삭제하게 했을까. 필자는 미국 자동차 업계의 로비와 민주당의 정치적 판단이 배경이라고 본다. 전기차 시장에서 부상하고 있는 우리 기업이 미국에 생산시설을 갖출 때까지 테슬라를 제외한 포드, GM 등이 자체 경쟁력 강화를 위한 시간을 벌게 하고자 했을 수 있다. 또한 양국 정부 간 포괄적 전략동맹 기조나 상원 투표 결과가 51대 50이었다는 점에서, 선거를 앞두고 여당인 민주당이 떨어진 지지도를 올리기 위해 독단적으로 이러한 내용을 밀어붙였을 가능성도 제기할 수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나 한미 FTA 분쟁해결 절차를 활용하는 것도 방편이겠지만, 현시점에서 현실적으로는 완성차 직전까지 국내 제조 후에 최소한의 최종 조립만 북미에서 진행해도 세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 간 협상을 통해 해결책을 찾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된다. 미중 갈등에 더해 미국 내 정치적 불확실성마저 높아진 지금 우리의 대미 협상력을 극대화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