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7·4 남북공동성명과 2022년 한반도
첫째, 7·4 남북공동성명 채택은 1960년대 말 미국과 중국의 긴장완화(데탕트)라는 전략적 연대의 산물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야 했다. 중국은 중소분쟁으로 소련과의 갈등이 확대된 상황에서 미국과의 연대가 필요했다. 미중관계의 정상화는 미소관계의 변화를 촉발했다. 1972년 5월 첫 미소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에 합의하는 등 소모적인 경쟁을 자제하기 시작했다. 동서독 간에도 이 무렵 기본조약이 체결되는 등 동서냉전의 완화는 여타 지역으로 파급됐다.
둘째, ‘닉슨 독트린’으로 명명되는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수정은 대미 의존적인 아시아국가들에 위기와 불안을 초래했다. 한반도에서의 남북 대립 관계와 중국-대만의 갈등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적 데탕트에 장애물로 비쳤다. 미국과 중국은 남북한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방위공약하에 있었던 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정치·군사력에서 벗어나 독자생존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현실적 과제에 직면하게 됐다.
셋째, 국제환경의 변화가 국내 정치에 내재화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박정희 정부는 한미관계를 동맹과 자주라는 양면적 차원으로 인식하였고 독자적인 국방력 강화를 위한 시간벌기를 위해 남북대화를 전개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9년 3선 개헌으로 국민적인 저항이 높은 상황이었다. 1971년 김대중 후보의 약진으로 수세에 몰렸으며 장기집권과 안보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했다. 이렇게 남측이 수세적인 상황이었다면 북측은 남북대화의 분위기를 공세적으로 활용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관철시키고 남측의 반공정책을 무력화시키며 통일전선전술을 강화하기 위해 7·4 남북공동성명 체결에 적극적이었다. 김일성 정권에 있어서도 남북대화 자체의 과실보다는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와해를 통한 적화통일의 여건 조성에 주목적이 있었다.
결국 이러한 산물로서 7·4 남북공동성명이 탄생되었고 남북 모두 데탕트하에서 화해의 흉내만 낸 것이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4 남북공동성명은 남북 당국 간 최초의 합의이자 냉전 속에서도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022년 한반도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지난 데탕트와는 달리 21세기 중국의 부상으로 미중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갈등이 고조되어 있다. 시진핑 정부가 전면적 소강사회, 중국몽 실현을 위해 미국의 견제에 맞불로 대응함으로써 사실상 대결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이 러시아를 제재하고 나섬으로써 신냉전의 가능성이 커지고 진영 간 갈등은 더욱 첨예해졌다. 과거 동서 진영 모두 남북관계 개선을 촉구했던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된 시기와는 달리 남과 북은 외교적 자율성보다는 진영외교에의 편입을 강요당하고 있다. 윤석열 보수정부는 미중 간 균형을 맞추려 했던 이전 문재인 진보정부의 시도를 무시하면서 대미 편향적 외교를 펼치고 진영에의 가담을 가속화하고 있다. 중국을 포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 중러 모두를 겨냥한 서방진영의 외교안보 복합체인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한국의 행보에 중국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북한 김정은 정권도 미중 갈등 국면 속에서 대중 밀착을 강화하고 있다. 중러는 유엔안보리 결의 위반인 북한의 핵 미사일 시험발사에 소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 편들기에 공개적으로 나섬으로써 이들로부터의 정치적 경제적 과실을 획득하고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과거의 좋은 점은 계승하고 부족한 것은 개선하면서 역사는 진보한다. 데탕트에도 불구하고 남북관계의 근본적인 화해보다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집착했던 과거와 같이 지금도 남과 북은 여전히 분단구조의 진영논리 속에서 각기 정치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우(遇)를 반복하고 있다. 과거에는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합의도 도출했으나 작금의 남북관계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락하고 있다. 다시 남북이 대화를 시도할 수 있는 국제적 여건에 밀려 남북대화를 전개할 것인가? 아니면 남과 북이 자주적인 노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이끌어 낼 것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남북이 진영논리에 매몰되는 순간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자율성은 상실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7·4 남북공동성명 50년이 주는 교훈은 사상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