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술에 대하여

입력 2022-06-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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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학박사, 연세대학교 명지병원 외래교수

술이란 것은 참 묘하다. 긴장을 풀어 주어 대인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다가도, 전두엽의 충동 억제 기능까지 긴장이 풀리게 되면, 폭력성을 발현시켜 오히려 관계를 망치게도 한다. 잠이 쉬이 들게 하여 수면의 촉매제 역할을 하지만, 숙면에 드는 것을 방해하여 잠의 질을 떨어뜨린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술을 중단하면 ‘금단 증상’을 일으켜 계속 마시게 하고, ‘내성’ 또한 발생하여 원하는 상태를 얻기 위해 섭취하는 술의 양이 점점 증가하게 된다. 즉 ‘알콜의존증’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중요한 사회적 직업적 활동도 제대로 못하게 되고, 술을 구하고 마시는 데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일이 발생한다. 시쳇말로 술에 가스라이팅 된 상태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들에게 그들은 보람보다는 좌절을 평생 안겨 준다. 입퇴원을 계속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병원이 아니라 모텔을 운영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서서히 정신과 육체의 기능이 쇠락해져 가는 그들을 지키보노라면 의료진과 가족, 환자 자신마저 점점 자포자기하게 된다. 정신과 의사를 꿈꿨던 청소년기에는 전문의가 되면 엄청난 초능력을 갖게 되는 공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추레하기 그지없다.

최근 퇴원한 한 환자가 있었다. 10여 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던 분이었다. 입원할 때마다 병동에서 소란을 피우는지라 나가면 속이 다 후련하기도 했다. 그런데 얼마 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여관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는데, 방에는 소주병이 수십 개 나뒹굴고 있었다고 하였다. 순간 정신이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눈물이 맺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감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외래 환자를 보느라 정신이 없던 와중에 유일한 가족인 형에게 연락이 왔다. 퇴근 후 옷도 못 갖춰 입고 조문을 갔다. 쓸쓸한 빈소에 향을 꽂으려다 문득 옆에 술이 있는 것이 보였다. 술을 한잔 청하고 정성을 다하여 상에 올려놓고 삼배를 하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러고 싶었다. 그를 알게 된 10여 년간 술 끊으란 말만 주야장천 했지, 그와 술 한잔 기울이며 다정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는 회한이 들었다고 해야 될까?

장례식장을 나서며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한, 별이 반짝이는 검은 밤이다. 어둠을 뚫고 걸어가며, 내일 아침에는 밝은 햇살이 주변을 밝히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유성처럼 스치고 지나간다.최영훈 닥터최의연세마음상담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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