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발언대] 미룰 수 없는 생존의 요구, 차별금지법

입력 2022-02-1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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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재 정의당 대변인.

살기 위해 죽은 척 했다

지난해 8월 아프리카에 위치한 국가 카메룬에서 트랜스젠더 여성 2명이 괴한에 의해 나체 상태로 30분 동안 집단 구타를 당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피해자는 생존을 위해 죽은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인터뷰를 남겼다.

동갑내기 군인 친구 故 변희수 하사를 떠나보내고 몇 달 지나지 않은 때였다. 기사를 보고 잠이 오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 죽은 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별이 극심해지면 폭력이 된다. 지금은 동성결혼이 법제화된 미국 역시 성소수자가 조롱과 구타를 당하는 어두운 역사를 지나왔다. 미국 최초의 커밍아웃 게이 정치인 ‘하비 밀크’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밀크>를 보면 1973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성소수자 시민이 혼자 거리를 다닐 때 항상 몸에 호루라기를 지니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을 대상으로 한 폭력이나 괴롭힘이 발생했을 때,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국가는 물론 법조차 성소수자를 보호하지 않던 시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호루라기를 지니고 집 밖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차별과 폭력이 만연하던 시절 ‘하비 밀크’는 호루라기 대신 메가폰을 잡았다. 소리를 넘어 목소리를 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는 시의원 선거에 직접 출마하여 성소수자 차별 해소를 이루려 했다. 실제로 그는 시의원이 되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동성애자 교사를 해고하려는 법의 통과를 막았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의 조례를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호루라기 독자생존 대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바로 세운 것이다.

‘하비 밀크’의 선택을 보면서 차별금지법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실감한다. 차별금지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없을 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호루라기를 몸에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호루라기 작은 소리를 낼 뿐, 차별을 예방하고 사후적으로 시정할 수는 없다.

국가가 법률을 통해 차별금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책임을 지는 일이 중요한 이유다. 시민이 ‘살기 위해 죽은 척’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면 삶의 존엄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계속해서 목소리 높여 주장하고 요구하는 이유다.

차별금지법은 죽은 척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내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 최후의 보루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법이다. 밤낮없이 죽을힘을 다해 일했지만 몇 달이 넘도록 월급을 받지 못했을 때, 이사를 앞두고 월세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서 전전긍긍할 때, 우리는 법의 문을 두드린다.

차별금지법 역시 다를 바 없다.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것만 해도 벅찬 수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차별을 당했을 때 두드리고 호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루를 마련하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가 제대로 해야 할 일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차별 앞에 도대체 언제까지 시민에게 알아서 호루라기를 몸에 지니고 다니라 말할 셈인가.

미룰 수 없는 생존의 요구이자 시대적 과제,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정치권이 합심하여 나설 때다. 죽은 척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을 늦추는 우를 더 이상은 범하지 말 것을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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