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 환전액 절반 줄게” 소개팅 앱 ‘로맨스 스캠’ 주의보

입력 2021-10-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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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한지 이틀 만에 현금화 제안
자가격리 이유 대면 만남은 꺼려
환전 수수료 갈취 등 범행 일삼아
사기범 계좌 지급정지 적용 난항
차명계좌 많아 피해금 회수 어려워

#“나 이거 가족한테 얘기하면 격리 끝나고 하는 사업 못 할 수 있어. 부모님 아시면 큰일 나.”

지난 8월 1일 본지 기자가 ‘환전 사기’를 취재하기 위해 카카오톡으로 연락하던 A씨는 기자에게 약 7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A씨는 연락을 시작한 첫날부터 이름과 나이, 사는 곳을 말하며 자신의 신원이 확실하다는 걸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현재 코로나19 확진자와 동선이 겹쳐 자가격리 중이라며 대면 만남의 여지는 차단했다.

카카오톡으로 영화와 음식 등 일상적인 얘기를 이어가던 A씨는 돌연 신경 쓰이는 일이 있다며 한 가지 부탁을 해왔다. A씨는 “(미국) 캔자스에 있으면서 놀았던 채팅 사이트가 있다”며 “문제가 생겨 운영진이랑 얘기했는데 해결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채팅 사이트에 캐시 충전해놓은 금액을 현금화하지 못하고 있다며 기자에게 충전금을 선물로 줄 테니 현금으로 환전해달라고 요청했다. 금액은 1350만 원이었다. A씨는 현금화에 성공하면 기자에게 절반인 675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연락한 지 이틀 만이었다.

최근 이처럼 타깃에게 접근하기 쉬운 소개팅 앱을 악용한 신종 금융사기가 급증하고 있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데이팅 앱 시장 규모는 830억 원으로, 이로 인한 금융 사기 피해 규모는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에 이르고 있다. 현재도 소개팅 앱 악용 사기는 계속 일어나고 있어 피해자 수와 피해액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공동소송 플랫폼 ‘화난 사람들’을 통해 모여 소송 절차를 밟고 있다. 피해자 추산 피해액은 15억8565만 원이며, 피해자 수는 110명이다.

사기범들은 타깃의 성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해 이들의 돈을 갈취했다. 타깃이 남성일 경우 A씨처럼 본인이 채팅 사이트 캐시 충전 금액을 환전할 수 없어 피해자에게 부탁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충전 금액이 며칠 뒤면 만료돼 현금으로 환전하려고 했지만, 충전한 본인은 환전할 수 없다는 사이트 방침을 내세운다. 여성일 경우엔 채팅 사이트의 환전 기능은 여성만 이용할 수 있다며 환전을 부탁했다. 일부 채팅 사이트가 여성에게 더 많은 기능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면서 피해자에게 이 충전금을 선물해줄 테니 대신 환전을 한 후 충전금을 반으로 나누자고 제안한다. 실제로 A씨는 본지 기자에게 “대화를 해보면 느낌이라는 게 있다”며 “그 부분(환전한 충전금)을 받고 잠수 탄다고 해도 원망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때 타깃이 환전을 해주겠다고 하면 사이트 방침을 설명하며, 환전하려면 ‘퀵 환전 아이템’을 구매해야 한다고 말한다. 채팅 사이트별로 다르지만, 이 아이템은 평균 35만 원이다.

▲A씨와 나눈 대화내용 캡처.
사이트는 아이템을 구매해 환전을 하려고 하면 환전을 신청한 금액의 10~20%를 수수료 명목으로 먼저 지급해야 한다고 안내한다. 피해자가 돈을 입금하면 입력한 계좌번호가 잘못됐다며 새로운 계정을 만들도록 유도한다. 이들은 피해자로 하여금 또다시 퀵 환전 아이템을 구매하고, 수수료를 입금하게 하는 방식으로 피해 금액을 늘린다. 한 피해자는 이 방식으로 8000만 원을 갈취당했다.

관련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법무법인 정진 소속 박영생 변호사는 “최초 연락 당사자 말고 사이트 운영자, 사이트 상담원 이런 쪽 통해서도 (피해자들이) 비용 지급 관련 독촉을 받는다”며 “이런 걸 보면 사실상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라고 말했다.

채팅 사이트 담당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피해자를 상대로 가상자산(가상화폐) 시세 조작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환전 사기로 3000만 원을 잃은 B씨는 사건 한 달 뒤 담당자라고 주장하는 이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사기당한 3000만 원을 해결해주겠다며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그는 “돈은 우리(채팅 사이트)가 보내줄 테니까 우리가 사라는 거(종목) 사면 된다”고 설명했다.

금융위원회는 이와 같은 로맨스 스캠에 대해 사기범의 계좌 이용을 막는 지급정지를 적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지급 정지 신청은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에 따른 전기통신금융사기일 때 가능한데, 환전 사기와 같은 로맨스 스캠이 전기통신금융사기로 볼 수 있는지는 따져봐야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간 감정을 나눈 채팅에 따른 금융 거래를 전기통신금융사기로 인정을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더 필요한 상황이다. 당장 이 같은 로맨스 스캠과 관련한 지급정지 조치가 이뤄지긴 힘든 것이다. 금융위는 관계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경찰청 등과 손잡고 신종 금융사기를 대응해 나간다는 계획이다.

환전 사기 피해자들의 피해금 회수는 어려울 전망이다. 피해자들이 돈을 보낸 계좌의 소유주는 환전 사기범이 아닌 단순히 계좌를 대여해주는 사람일 가능성이 커 사기범을 잡기 힘든 이유에서다. 사기범을 잡았다 해도 그가 돈이 없다며 합의를 거부하고 징역을 살겠다고 주장할 땐 피해금을 돌려받을 수 없다. 국정원 관계자는 “최근 데이팅 앱을 악용한 일부 조직의 경우 유령 회사를 세우거나 가상 암호화폐 거래소를 설립해 피해자를 기만하는 사례가 목격되고 있다”며 “이런 치밀함 탓에 당사자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로맨스 스캠(ROMANCE SCAM)
로맨스와 스캠의 합성어. SNS를 통해 상대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후 돈을 가로채는 사기의 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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