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지금] 노동과 인권이 보장되는 무역

입력 2021-09-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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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동아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낮은 수준의 노동기준을 가진 국가가 통상관계에서 불공정한 이익을 얻어 왔는가?’

미국과 유럽은 오랜 기간 국제통상과 노동기준의 연계 방안에 대해 논의해 왔다. 이런 국제사회의 깊은 고민은 이미 18세기 말부터 존재해 왔다. 이에 대한 다자주의적 접근은 1919년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전범국 처리를 위해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약 제13장을 토대로 설립된 국제노동기구(ILO)는 오늘날 가장 오래된 국제기구로서 노동권한의 범위와 기준을 제시해 왔다. ILO 협약은 국제노동기준으로 세계 어느 나라 노동자라도 기본적 노동권한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국제규범을 제시한다. 이후 1947년 탄생한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은 좁은 의미의 무역-노동 연계 사항만 규율하고, 대부분의 노동 문제를 ILO에서 다루도록 하는 이분화 체제를 만들었다.

1995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 내 ‘블루라운드’에서는 무역과 노동, 인권 연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WTO와 ILO는 강제노동 금지, 죄수노동 금지, 아동노동 금지, 노조활동 자유 등과 같은 인권 및 노동기본권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보편화된 노동기준을 제시하고자 한다. 하지만 두 기구의 무역과 노동 연계에 관한 목적과 의도에는 사뭇 차이가 있다. WTO 블루라운드에서는 통상의 범주에서 ‘국제무역, 투자와 노동기준이 상호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 논의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노동기준과 통상을 연계하여 국제 근로기준을 제시하고, 이의 이행 여부에 따라 혜택 혹은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즉, 각국의 근로조건을 국제적으로 표준화하여 열악한 근로조건하에서 생산된 개도국 상품에 ‘불공정 경쟁(Unfair Competition)’으로 판정하고 무역제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후발 개도국들은 각국의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노동기준이 상이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였고, 경제발전 정도나 노동시장 구조, 역사·문화적 배경이 다른 나라에 동일한 노동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무려 한 세기에 걸친 무역과 노동, 인권 연계에 관한 다자적 논의의 한계를 직시한 미국과 유럽은 새로운 수단과 방식을 통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미국은 특정 국가의 사례를 지목하여 즉각적이고 강제적인 조치를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90년대 후반 캄보디아를 필두로 베트남, 인도네시아, 요르단, 리소토, 아이티, 니카라과 등에서 시행된 ‘더 나은 노동 프로그램(Better Works programme)’을 통해 미국-개도국의 쌍무적 관계에 노동기준 개선 감시를 위해 ILO를 연계시키는 복합적 무역-노동·인권 연계 전략을 취한 바 있다. 이러한 협력 파트너십 구축을 통한 접근과 동시에 미국은 노동·인권 착취 생산품에 대한 인도보류명령(WRO, Withhold Release Order) 부과로 즉각적 처분을 진행해 왔다. WRO는 미 세관에서 규제 대상 물품을 압류하고, 일정기간 내에 수출기업이 이를 회수하지 않을 경우 직권파기 처분하는 조치이다. 90년대 초중반 미국은 WRO 부과 방식에 의존하여 해당 이슈를 통제했다. 올해 초 미 행정부는 중국 신장(新疆) 지역 소수민족인 위구르족에 대한 인권 탄압을 이유로 신장산 면화 제품과 토마토에 대한 수입 제한 조치를 단행하였으며, 이어 6월 신장의 태양광 발전 부품에 대해서도 수출입을 규제하였다. 동시에 주요 7개국(G7) 회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제연합(UN) 등과 함께 해당 문제에 대한 공동 포위망을 촉구하였다.

유럽연합(EU)은 무역과 노동, 인권 연계에 보다 장기적이고 제도적인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유럽의회는 올해 초 노동권 및 인권침해, 환경훼손 등의 방지를 위한 포괄적 영역에 대한 기업의 공급망 실사 의무 지침(Due Diligence Directive)을 채택하였다. 이 지침은 EU 내 설립·운영되는 기업에 대해 역내·외 전체 가치사슬의 광범위한 환경, 사회 및 기업 지배구조(ESG: Environment, Social, Governance) 실사 요구사항을 부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EU 진출기업 및 수출기업은 자체 사업뿐 아니라 계열사, 나아가 부품을 공급받는 기업에 대한 ESG 실사 의무를 지게 된 것이다. 대상 기업은 공급업체 및 서비스 제공업체에 대한 독립 감사, 계약에 대한 추가 약속, 행동강령 준수 요구 사항 등의 결과 게시, 구현 및 보고의 의무를 진다. 이 지침은 올해 말이나 내년 채택될 것으로 예상되며, 채택 이후 2년 이내에 회원국 국내법으로의 조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제 우리나라도 무역과 노동 연계에 대해 단순히 외압이나 국제 흐름에 대한 대책을 넘어 ESG 부문 선도 역량을 갖춘 국가로 변모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업과 관련 학계는 발 빠르게 이에 대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산·관·학 조직을 통해 ESG 관련 포괄적 정책을 입안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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