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로] 은행의 완전지준금제도를 검토하자

입력 2021-09-0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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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경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장

돈이라고 하면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을 떠올린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 보면 오늘날의 돈은 대부분 일반은행이 창조한다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교과서가 가르치듯이 오늘날의 상업은행은 부분지급준비금제도에 따라 운영된다. 일반은행은 예금의 일정액만을 지준금으로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할 수 있다. 은행이 애초에 예금으로 1억 원을 확보했고 지준율이 5%라면 19억 원을 대출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애초의 예금 1억 원만이 아니라 19억 원의 대출까지 합쳐 총 20억 원이 수표나 현금카드를 통해 사용할 수 있는 엄연한 돈이 된다. 이처럼 통화량 20억 원 중에서 19억 원이 은행이 무에서 창조한 신용화폐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화폐제도는 나라가 돈을 창조하는 법정화폐 체제가 아니라 상업은행화폐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현 체제를 뒷받침하는 은행의 부분지준금제도는 자본주의의 여명기에 탄생하여 산업혁명의 자금을 제공한 혁신적 제도이다. 저축된 돈보다 몇 배나 되는 돈을 창조하여 많은 잠재성 있는 사업에 풍부하게 자금을 제공했고, 이를 통해서 산업혁명과 이후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빅셀, 하이에크, 피셔 등 많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지적했듯이 부분지준금제도는 경기순환의 주된 원인이다. 왜냐하면 화폐가 대부분 대출에 의해서 창조된, 상환해야 하는 부채이기 때문이다. 앞의 예에서 통화량 21억 원 중에서 20억 원은 화폐인 동시에 민간부채이다.

이 제도에서는 대출을 통해서 통화량이 늘어나면 경기가 활성화되지만 그것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기업가는 대출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러나 경제는 수요의 제약 때문에 대출보다 더 많은 수익금을 영원히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대출을 뒤늦게 받은 기업가는 부채를 상환할 수 없게 되며 은행은 곤경에 처한다. 그러면 경제 내의 통화량은 대출이 늘어날 때와 정반대의 과정을 거쳐 급격히 축소되고 경제는 디플레이션 위기로 치닫게 된다. 결국 부분지준금제도에 의해 통화가 공급되는 경제에서 경기 활황은 부채의 부담 때문에 위기를 맞이할 운명을 타고난 것과 같다.

사실 많은 학자들은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을 1920년대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확장적 신용정책에서 찾았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도 상업은행의 무분별한 신용 확대가 원인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대공황 이후 나이트, 사이먼즈, 프리드먼 등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들은 ‘시카고 플랜’이란 이름으로 부분지준금제도를 완전지준금제도로 전환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 계획은 한동안 잊혔으나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 국제통화기금(IMF)의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다시 부활하여 세계 경제학계의 새로운 의제로 떠올랐다.

완전지준금제도는 은행이 예금의 100%에 해당하는 준비금을 보유하도록 하여 은행의 신용창조를 금지한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운 부분지준금제도를 너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 제안은 뜻밖의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 또한 이 제도는 중앙은행이 아닌 정부가 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전제하므로 더더욱 의외이다.

하지만 부분지준금제도의 한계는 분명하다. 이 제도에서 중앙은행은 보통 국채를 매입하는 방식으로 본원통화를 공급하며, 상업은행이 창조한 신용화폐는 화폐인 동시에 민간부채이다. 경제가 순조롭게 성장하려면 통화량이 늘어나야 하지만, 현 제도에서 통화량이 늘어나면 동시에 정부부채와 민간부채가 늘어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으로 정부와 민간의 높은 부채 수준으로 긴축적인 금융 및 재정정책을 요구하는 강력한 흐름이 있다. 그런데 현 제도에서 부채 감축은 통화량 감축을 의미한다. 결국 현 체제는 경제활성화를 위해 통화량을 늘리면 부채가 늘어나고, 그래서 부채를 줄이면 통화량이 줄어들어 경제가 위축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논리적인 방법은 부채를 증가시키지 않으면서 화폐를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부분지준금제도의 제한과 정부에 의한 화폐 발행에 관한 논의들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 학계는 이 논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모든 사회제도는 진화한다. 화폐 및 은행제도도 예외가 아니다. 보다 열린 시각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논의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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