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데이트 폭력'의 끝은 '죽음'이었다

입력 2021-08-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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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희 사회경제부 기자

A 씨의 남자친구는 화를 자주 냈다. 처음엔 목청을 높이는 정도였는데 30분 정도 연락이 닿지 않으면 "왜 전화 안 받아", "누구랑 있어?"라며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반복되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던 A 씨는 남자친구에게 "이러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럴 때마다 남자친구는 "사랑해서 그래", "네가 똑바로 하면 되지"라고 했다. 때떄로 남자친구는 A 씨를 밀치거나 뺨을 때리기도 했다.

문제는 A 씨가 1년여 동안 남자친구를 만나며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 널 위해 그런 것'이라는 말에 세뇌됐고, '혼내는' 남자친구에게 어느새 길들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A 씨는 변심한 남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당한 뒤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본 유튜브에서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여성의 고민 상담을 봤다.

사람들은 말했다. "가스라이팅과 데이트 폭력이 맞습니다. 조상신이 살리셨네요."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데이트 폭력의 현실, 새롭게 읽기' 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경찰청 전국자료로 집계한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1만9940건이다. 2017년 1만4136건 대비 41.1% 나 급등한 수치다. 유형별로는 △폭행·상해 7003건(71.0%) △경범 등 기타 1669명(16.9%) △체포·감금·협박 1067명(10.8%) △성폭력 84명(0.8%) 순이었다. 살인으로 이어진 경우도 35건(0.3%)에 달했다.

연간 피해자가 2만 명에 달하지만, 데이트 폭력을 처벌하는 법률이 없다. 전문가들은 데이트 폭력은 늦은 신고, 피해의 지속성, 증거수집 시기의 지연 등 특수성이 있어 기존 형법, 성폭력방지특별법과 다른 데이트 폭력 법안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범죄'라는 인식도 낮다. 우리 사회는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난 폭력이기 때문에 '죽음'에까지 이르렀어도 일반적 폭력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조윤오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국내 경찰관은 데이트 폭력 사건을 '두 개인 간의 사적인 문제'라고 보는 경향이 강했다.

연인의 폭행으로 숨진 황예진(26) 씨의 사건에 대해서도 그렇다. 온라인에선 '왜 남자의 후두부를 가격했느냐'며 '살인의 고의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온다. 급기야 정당방위라는 주장도 있다.

자신이 맞았다고 때려죽이는 건 정당방위가 될 수 없다. 보복범죄 가능성에 대해 들여다봐야 한다. 한 씨의 죽음이 정당방위로 포장된다면 데이트 폭력이 살인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앞으로 더 많이 마주하게 될 것 같아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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