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10. 탄력받는 유럽의 사회정책

입력 2021-07-0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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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시장, 그러나 엄연한 사회·경제적 격차…EU가 나서 국가·지역간 ‘키 맞추기’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실업 급여 차이가 거의 70배 나는 지역이 있다. 바로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부자 나라인 네덜란드와 가난한 루마니아 시민들의 실업수당이 이 정도 차이가 난다. 루마니아 성인 실업자의 경우 월 30유로, 4만1000원의 보조를 받는다. 그리고 한 달에 11시간의 공공근로를 의무적으로 해야 이 급여가 유지된다. 반면에 네덜란드의 실업자는 평균 한 달에 2135유로, 약 275만 원을 받는다. 1주에 한 건의 구직 활동을 했다는 서류만 제출하면 이 급여를 계속 받을 수 있다.

고임금 좇아 빈국→부국 두뇌 유출 심각

상품과 서비스, 자본과 사람이 아무런 장벽 없이 자유롭게 이동하는 경제·정치블록이 EU이다. 세계 그 어느 지역도 이 정도로 통합이 진전된 곳은 아직 없다. 회원국 간의 자유이동이 이런 실업급여나 임금격차를 보전해 준다. 2004년에 EU 회원국이 된 폴란드와 헝가리, 체코 등의 중부유럽 국가들과 2007년에 합류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시민들은 주로 서유럽의 부자 회원국으로 이주해 일한다. 비자가 필요 없기에 가난한 회원국 시민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등 부자 나라로 가서 일하며 보통 반 년 정도 세금을 내면 그곳에서도 실업급여 등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중부유럽이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이 때문에 두뇌 유출이 심각하다. 주로 젊은이들이 부유한 나라로 가서 일한다. 그러나 회원국 간의 경제적 격차를 언제까지 이런 시장원리에만 맡길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서 유럽 차원의 사회정책이 필요하다. 유럽통합 과정에서 사회정책은 점진적으로 강화돼왔고 최근 다시 탄력을 받고 있다.

초기 ‘유럽경제공동체=자본가클럽’인식

1975년 6월 5일 영국 유권자들은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 현 EU의 전신)에 계속 잔류해야 하는가에 대해 국민투표를 치렀다. 67%가 넘는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유럽통합에 계속 합류해야 한다고 투표했다.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와 거의 동일한 이유에서 이런 투표가 실시됐다. 당시 집권 노동당은 유럽통합의 지속 여부를 두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집권당은 이런 당내 분열을 매듭짓기 위한 국내 정치적 카드로 브렉시트를 활용했다. 노동당의 주류를 이뤘던 노동조합은 EEC가 자본가들만을 위한 클럽이라며 탈퇴 운동을 벌였다. 유럽통합이 처음에는 시장개방을 우선했기에 노동자들의 보호가 충분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을 열어 젖힐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경제공동체 = 자본가 클럽’이라는 인식은 단일시장 완성 과정에서 상당히 변했다. 유럽 차원의 사회정책이 점진적으로 도입됐기 때문이다.

‘1992년 계획’ 보완책으로 사회정책 도입

1987년 당시 EEC 12개 회원국들은 1992년 12월 31일까지 단일시장(내부시장)을 형성하기로 합의했다. 회원국 간의 관세장벽은 사라졌지만 상이한 표준이나 검역지침 등 수많은 비관세장벽이 상존했다. 이를 폐기하기 위한 법을 만들어 점차 하나의 시장을 만들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의 역할이 컸다. 당시 자크 들로르 집행위원장은 지역정책과 사회정책을 과감하게 제안하고 실행에 옮겼다.

1980년대 EEC 회원국이 된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모두 기존 회원국과 비교해 경제적으로 빈곤한 국가였다. 세 회원국은 낙후된 지역을 지원해주는 지역정책(결속정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국 1987~1992년 농민을 지원해주던 공동농업정책 지출 예산을 거의 절반으로 줄이고 지역정책 지원을 그만큼 확대했다.

아울러 들로르 위원장은 비관세장벽을 허무는 거의 모든 분야의 시장개방으로 상대적으로 약세에 몰린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EU 차원의 사회정책을 제안했다. 노동자 보호와 근로조건 개선 등을 유럽 차원의 단일 규정으로 만들어 보호하는 내용이다. 또 집행위원회가 유럽 차원의 노동자 및 고용주 단체와 대화를 하여 정책을 제안할 수 있게 됐다. 1993년 유럽연합조약(마스트리히조약)은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는 조항을 채택했다. 하지만 영국 같은 일부 회원국들의 반대로 사회정책 관련 조항은 조약의 부속 조항인 의정서로 채택되어 법적 구속력이 상대적으로 약했고 영국은 이 조항의 적용을 유보했다.

▲5월 8일(현지시간)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열린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서 안토니우 코스타(왼쪽부터) 포르투갈 총리,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정상회의에서는 27개 EU 국가 및 정부 수반 중 24명이 참석하여 향후 10년 동안 EU 블록의 사회적 의제를 설정했다. 포르투(포르투갈)/신화연합뉴스

2017년 예테보리서 2021년 포르투까지

이후 유럽의 사회정책은 점진적으로 확대 강화되었다. 2003년 EU는 노동시간 지침을 채택했다. 이 지침에 따르면 17주(4개월) 평균으로 주당 48시간 초과 근무 금지, 18세 이하의 경우는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 초과 근로가 금지되어 있다. 1년에 최소 4주의 유급 휴가가 보장되며 야간과 순환 근무자의 경우 고용주가 특별히 이들의 건강 보호에 신경을 써야 하고 근로자들은 무료 건강검진 권리를 갖는다. 모든 회원국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내용이다. 1990년대 의정서로 채택된 상당수가 이처럼 법적 구속력을 보장받는 유럽 차원의 사회정책으로 법제화됐다. 모든 회원국이 이를 준수해야 하고 시민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다.

2017년 하반기 EU의 순회의장국이던 스웨덴은 EU 차원의 사회권 강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해 11월 중순 고도 예테보리에서 개최된 EU정상회담(유럽이사회)에서 27개국 수반들은 유럽의 사회적 제권리 기둥에 합의했다. 남녀 근로자의 평등, 동등한 기회, 최저 소득, 노사의 사회적 대화 등 20개 원칙과 권리가 천명되었다. 기존에 실행되던 권리를 재차 확인하고 이를 더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2020년 세계를 휩쓴 코로나19는 사회적 유럽의 강화를 더 촉진시켰다. 기후변화와 디지털 전환에 팬데믹까지 겹친 상황에서 EU는 공동체 차원에서 대응을 강화했다. 8000억 유로(1000조 원)의 유럽경제회생기금(ERF)이 합의되어 실행에 들어갔다. 올해 상반기 순회의장국이던 포르투갈은 5월 7일부터 이틀간 북서 항구도시 포르투에서 사회적 유럽 건설을 주요 의제로 하는 EU정상회담을 개최했다. 2010년 단일화폐 유로존 위기 당시 포르투갈도 ‘피그스’(포르투갈,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의 하나로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수십만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 아픔을 경험했다.

2030년까지 달성할 3대 목표 제시

중도우파 사회당의 안토니우 코스타 포트투갈 총리는 이 자리에서 2030년까지 EU회원국 모두가 달성해야 할 3대 목표를 제시했다. 20~64세까지 경제활동인구의 78%가 취업할 것, 모든 성인의 60%가 해마다 교육훈련에 참여할 것, 절대빈곤의 위험에 처한 시민의 수를 최소 1500만 명 줄일 것 등이다. 세 가지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회원국과 EU기구, 노사가 모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2020년 ‘사회적 유럽 선언문’을 출간한 영국의 정치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유럽연합 차원의 정책이 가능함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유럽’의 특징으로 지적했다. 그는 유럽이 기후변화와 디지털 규제 등 여러 분야에서 표준을 설정하는 막강한 권한을 보유했다며 이를 수단으로 사회정책을 한층 더 강화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팬데믹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더 커진 우리에게도 EU의 이런 실험은 의미가 있다. EU 기구와 회원국이 큰 틀을 마련하고 노사가 서로 논의해 위기를 극복하고자 쉼없이 상생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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