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

입력 2021-06-0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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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미 전북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올해 전문의 시험에 합격해 의사로서 다시 한번 새로운 시작을 맞는 나는 다짐을 하나 했다. 환자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하자, 마치 애인을 만날 때처럼. 여기저기 소독약과 체액 등으로 얼룩진 수술복을 새것으로 갈아입으며 설레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선다.

나를 만나기 위해 고창, 정읍 등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와 데스크 간호사의 문진과 인턴 선생님의 초진을 거쳐 족히 1시간을 넘게 대기한 환자들에게 나는 준비된 모습을 보여야겠다, 아니 보여야 한다고 다짐한다. 다른 과(科)와 달리 산부인과를 내원하는 환자들은 의사를 만나기 전 특별히 더 많은 준비를 하고 온다. 전날 저녁 샤워할 때부터 회음부 등의 청결을 관리하고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가장 깔끔한 것으로 챙겨 입는다. 이렇게 많은 준비와 기다림을 거친 그녀에게 나도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병실이나 응급실 환자를 진료할 때와 달리 외래에서의 진료는 의사의 실력 못지않게 외모나 옷차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단순히 예쁨과 멋있음의 문제가 아니라 ‘성의’의 문제이다. 잦은 당직과 과중한 업무로 언제 갈아입었는지 가늠하기 힘든 지저분한 수술복에 막 자고 일어난 것 같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환자들을 만났던, 전공의 시절의 나의 준비되지 않은 모습들을, 오늘 나는 반성한다.

두꺼운 전공 서적을 달달 외우고 효과적인 봉합술을 익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 환자를 만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 이 기본적인 관계의 기술을 나는 전문의가 되고서 이제야 깨닫았다. 아니다,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다. 오늘 아침 나는 오전 진료를 위해, 가장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머리칼을 차분하게 정리한 뒤 은은한 향수 한 방울을 더해 당신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한다.홍유미 전북대병원 산부인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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