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전반기와 후반기가 너무도 달랐던 당 현종

입력 2021-04-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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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明君)과 혼군(昏君)을 한 몸에…양귀비와의 만남, 왕조 쇠락으로 치달아

당나라의 여제(女帝) 측천무후 만년, 나라 정세는 어지러웠지만 당 현종(玄宗)이 즉위한 뒤 비로소 혼란 국면은 안정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궁정 정변으로 중앙집권은 쇠퇴하고 관리들은 부패했으며 변경에서 이민족과의 충돌도 잦아졌다. 특히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반란은 당 왕조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토지겸병도 심해졌고 농민들은 집단적으로 유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현종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규율을 지키고 현명한 신하를 등용하였으며 백성에게 관심을 쏟고 치국에 열정을 바쳤다.

국리민복, 민생과 국가경제를 중시

현종은 국리민복을 추구하면서 민생과 국가경제를 중시하였다. 그는 우선 수리사업을 크게 발전시켰고, 대규모로 개간 사업을 일으켰다. 이와 함께 황하의 식량 운반 방식을 개혁하는 등 농업 생산의 총체적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면서 관료 제도를 정예화하고 정돈하여 불필요한 관직을 폐지하고 쓸모없는 관리 수천 명을 파면하였다. 그러면서 평가 제도를 정비하여 업무 성적이 좋지 않은 관리는 도태시켰다. 이렇게 하여 국가 재정은 크게 절약되고 행정 효율도 높아졌다. 또한 군사적 측면에서는 모병제를 실시하고 군마를 증가시켰으며 변경의 둔전을 개척하고 변경 정책을 완화하여 변경 상황을 안정시켰다.

현종은 요숭을 비롯하여 송경, 한휴, 장구령 등 현신(賢臣)을 등용하였다. 요숭은 재상이 되기 전 현종에게 언로를 개방하고 상벌을 분명히 하며 변경의 전공을 탐하지 말 것, 그리고 황제의 친족 및 공신과 환관의 전횡을 금할 것 등 열 가지 사항의 개선을 요구하였다. 현종은 이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였고, 이로부터 개원(開元) 시정의 기본 방침이 다져졌다. 요숭의 뒤를 이은 송경은 강직하고 아부를 멀리하며 반드시 법을 지키는 철골(鐵骨)의 신하였다. 이들 현상(賢相)들은 서로 협력하여 부역을 감소시키고 형벌을 간략화했으며 백성을 풍요롭게 하였다. 현종 스스로도 절약하고 검소하여 모든 궁녀들을 집에 돌려보냈다.

漢·宋이 미치지 못한 ‘開元盛世’ 열어

이렇게 하여 이른바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열었다. 당 태종 때 360만 호였던 인구도 이 시기에 이르러 900만 호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당 왕조의 극성기였다.

현종 21년에 한휴가 재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한휴는 매우 곧은 성격의 인물이었다. 현종은 가끔 지나친 유흥을 즐길 때면 스스로 마음이 찔려 좌우를 돌아보면서 “지금 이 사실을 한휴가 아느냐 모르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한휴의 상소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는 많은 신하들이 “한휴가 재상이 되고 난 뒤 폐하께서는 옥체가 쇠약해지셨습니다”고 말하면서 한휴를 은근히 비방하였다. 그러자 현종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짐은 쇠약해졌지만, 천하는 한휴 때문에 살쪘다.”

명나라 말기 저명한 사상가인 왕부지(王夫之)는 ‘개원’ 시기의 성세를 가리켜 한나라와 송나라가 도저히 미치지 못한 정도라고 평하였다.

▲당 현종은 ‘개원성세(開元盛世)’를 열어 태종 이세민 이후 당나라의 재번영을 이끌기도 했으나 만년에 양귀비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왕조를 쇠퇴시킨 황제이기도 했다.

후반기 들어 향락 빠지며 국정 멀리해

하지만 당 현종 말기에 이르러 다시 부패가 심해졌다. 전체 인구 5291만 명 중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 수가 자그마치 4470만 명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국가 재정은 기울고 사회의 재부(財富)는 대지주와 대귀족에게 독점되는 한편 농민들의 부담은 도리어 갈수록 무거워졌다. 토지겸병은 극심해지고 농민들은 파산하고 도탄에 빠져 반란이 속출하였다.

겸허하고 신중하며 국정에 몰두하던 현종은 갈수록 안일을 탐하고 자만하여 향락에 빠지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현능한 인물을 멀리하고 친족만 기용했으며 간언을 물리치고 백성들의 고통에는 눈 감았다. 쓸모없는 관리를 없애는 대신 나라에는 무능한 관리들로 가득 찼다. 후궁도 4만여 명이나 두었다. 황제가 투계와 경마에 빠지게 되니 시중에서는 “자식을 낳아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네. 투계 경마가 독서를 이기니”라는 민요가 불려졌다. 해마다 생일잔치를 크게 열었으며 연일 연회를 베풀고 백관에게 큰 상을 내렸다. 또 토목사업을 크게 벌이고 화청궁(華淸宮) 등 궁전을 화려하게 지었다.

허명(虛名)에 대한 집착도 높아져 그에 대한 칭호는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증도효덕황제(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證道孝德皇帝)”로 되어 더 이상 보탤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아가 군사 분야의 전공도 탐하여 걸핏하면 무력을 사용하여 변경에서 무수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고, 이민족에게도 엄청난 재난을 안겨 주었다. 필연적으로 국가 재정도 궁핍해졌고 농촌의 토지도 황폐화되었다.

양귀비와의 만남…안록산의 반란

현종은 특히 만년에 이르러 양귀비(楊貴妃)를 총애하고 간신 이림보와 양귀비의 친척 오빠 양국충을 중용했는데, 이는 정치 부패의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양귀비의 가족들은 모두 부귀영화를 누려 세 명의 언니는 국부인(國夫人)이라는 높은 지위를 얻었고, 양국충은 무려 40여 개의 요직을 겸하였다. 수많은 관리들이 양귀비에 접근하여 진귀한 선물을 바치고 고위 관직을 얻었다. 유주 절도사 안록산은 스스로 양귀비의 양자가 되어 현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하지만 그가 통솔하는 정예병사는 이미 당 왕조 중앙정부의 병력을 능가하고 있었다. 마침내 755년 안록산은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 자리 물러나 쓸쓸한 최후

현종은 양귀비와 함께 궁을 빠져나와 도망쳤지만 행군 도중 사병들이 양국충을 쏘아 죽이고 이어 황제에게 양귀비를 죽이라고 요구하였다. 현종은 양귀비가 스스로 목을 매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757년 현종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궁에 연금되었고, 그로부터 5년 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가운데 회한과 비분에 쌓이고 병마에 지쳐 마침내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중국 역사에서 당 현종처럼 명군(明君)과 혼군(昏君), 그리고 역사상의 현군과 역사의 죄인이라는 두 가지 전형이 한 몸에 집중된 제왕은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당 현종은 사라졌고, 당 왕조 역시 쇠락해져서 다시 재기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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