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 풍경] 숫자로 상상한 환자 너머에

입력 2021-02-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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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가정의학과 전문의

내 앞에 내밀어진 혈당 수첩을 한 장씩 팔랑팔랑 넘겨 가며, 마주 앉은 환자분의 지난 2개월을 상상해 본다. 간간이 혈압이나 맥박, 먹은 음식, 등산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으면 더 상상하기 쉽다. 문득 높은 혈당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면 환자분의 얼굴에는 멋쩍은 웃음이 떠올라 있다. 내가 숫자만으로 지난 시간을 상상해볼 수 있는 건, 그 분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대략 어떻게 드시는지도 알기 때문이다.

숫자는 진료차트에서 너무 중요하다. ‘증상이 2일 전부터라고요, 아니 2개월 전부터라고요?’ ‘체온이 37.8도, 아니 38.7도?’ 숫자로 환자를 상상하기. 우리 의사들은 인턴 시절부터 이걸 훈련한다. 병동 당직을 설 때 간호사의 전화를 받으며 나이, 성별, 주소로 시작한 각종 숫자를 들으면서 그걸로 환자의 이미지를 눈앞에 그려본다. 환자를 병동에 가서 실제로 만나면, 내가 상상하던 환자와 판이하게 다를 때도 있고, 흡사하다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차이를 의식하고 조금씩 줄여가는 훈련을 하는 시기가 젊은 의사의 수련 기간이기도 한데, 연차가 더해질수록 차이가 줄어들어야 잘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다.

언젠가부터 병동을 떠나 외래 진료실에만 있으니, 차트의 숫자들로 환자를 상상하는 일은 이제 거의 없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지역사회 왕진을 시작하고 나서, 여러 기관들에서 보내온 의뢰서의 숫자를 통해 상상했던 환자의 모습이 실제 가정을 방문하였을 때 와장창 깨지는 경험들을 새로이 하고 있다.

뇌경색으로 인한 편마비로 꼼짝도 못 하고 집 안에 3년째 누워만 계시는 환자분 댁을 방문했을 때, 가족들이 내민 혈당 수첩 안의 숫자는 완벽했다. 퇴원 초기 혈당 조절이 잘 되지 않자 다시 뇌경색이 올까 두려워진 가족들이 식사량을 조금씩 줄이기 시작해 내가 방문했을 때 환자분이 바싹 말라 있는 상태였다는 건, 숫자가 보여줄 수 없었다. 완벽한 혈당 수치가 도리어 독이었다. 3년째 혈액검사도 못 하고, 오로지 그 혈당 수첩에만 의지해 대학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던 중이었으니까. 숫자로 환자를 상상하는 건 의사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아가는 것이 주치의의 역할이기도 하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추혜인 살림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 가정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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