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나메기 세상’ 꿈꾼 영원한 청년 백기완 선생 영면… 향년 89세

입력 2021-02-15 17:10수정 2021-04-3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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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노동절 서울시청광장에서 연설하는 모습. (사진제공=통일문제연구소)

날짐승 중 으뜸이라는 장산곶 마을의 장수매, ‘장산곶매’. 황석영의 장산곶매는 마을을 지키곤 생을 다했지만, 백기완의 작품에선 하늘로 훨훨 날아 떠난다. 흰 두루마기 차림으로 늘 투쟁의 현장에 앞자리를 지키고 섰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별세했다. ‘재야의 대부’를 자처하던 그는 장산곶매처럼 하늘을 품으러 떠났을까. ‘산자여 따르라’던 그의 외침만이 남아 정계도 슬픔에 빠졌다.

서울대병원 등에 따르면 백 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이어오던 중 이날 오전 영면했다.

백 소장은 지난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 등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백 소장은 시, 소설 등 문학 작품을 읽고, 영어사전을 모두 외우는 등 독학으로 학업에 매진했다. 이후 분단으로 여덟 식구가 흩어지는 상황에 이르자 갈라진 집안을 하나로 잇기 위해 통일 문제 등에 대해 고민하고 인식을 넓혔다.

백 소장은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이끌던 중 1960년 4·19혁명에 참여했고, 1964년 함석헌, 장준하, 계훈제, 변영태 등 재야 운동가들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다.

백 소장은 여러 사회 운동을 주도하다 끊임없이 고문과 투옥 생활을 지내야 했다. 지난 1974년 유신 반대를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한 긴급조치 위반으로 투옥됐다. 이후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양 성고문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른 바 있다.

1987년 대선에서는 독자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 대선에도 독자 후보로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왔다.

‘영원한 청년’ 백기완 소장의 다양한 사회 참여는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이명박 정권퇴진운동을 비롯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광화문 촛불집회에는 23차례 모두 참여했다.

백 소장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수필집을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다. ‘항일민족론’(1971),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 ‘백기완의 통일이야기’(2003),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2009), ‘두 어른’(2017) 등 다수의 저작도 남겼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백미담, 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민주화, 통일, 노동 운동에 헌신한 백기완 소장은 폐렴 증상으로 투병 중에도 의식이 있을 때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김진숙 지도위원의 복직을 촉구하는 글귀를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는 이날 오후 1시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송경동 시인은 “백기완 선생님은 병상에 있으면서도 민주주의와 평화통일, 노동자 권리가 회복되는 세상에 대한 마음을 놓지 않았다”며 “병상에서 쓰신 마지막 글귀들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36년 전 해고당한 노동자 김진숙의 복직을 촉구하며 ‘김진숙 힘내라’였다”고 말했다.

백 소장의 딸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중어중국학과)는 “아버지의 마지막으로 남기신 글귀는 ‘노나메기’였다. ‘노나메기’는 너도나도 일하되 모두가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란 뜻”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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