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생 김유진’이 사는 법] 절망의 터널서 한줄기 희망을 노래하다…

입력 2021-01-01 05:00수정 2021-01-01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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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성취’ 만족하며 살아왔고 이상과 현실 괴리에 좌절…‘말하는 대로’ 나자신 이루려 노력

▲‘좌절의 터널, 그래도 출구는 있다.’ 본지 92년생 기자들이 영화 ‘기생충’ 촬영지인 서울 종로구 자하문 터널을 걷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1992년생은 치열한 경쟁에서 크고 작은 성취를 내며 학창시절을 보냈고 특별히 못난 구석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서른 살인 지금 이상과 현실의 차이 앞에 수없이 좌절한다. 이투데이는 92년생 기자 4명의 심도 있는 취재로 2021년 현재를 살아가는 92년생을 중심으로 90년대 생 삶의 모습을 3회에 걸쳐 풀어봤다.

92년생 김유진 씨는 올해 나이 서른이다. 유진이라는 이름은 1990년대 가장 많이 사용된 이름이다. 유진 씨는 1992년생을 대표하는 가상인물로 실제 사례를 모아 재구성했다.

유진 씨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후 모 광고대행사에 3년 전 취업했다.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서울 영등포에서 보증금 1억 원에 30만 원짜리 반전세로 살고 있다. 유진 씨의 아버지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해고됐다 재취업했다. 어머니가 맞벌이로 힘을 보태 어려운 시절을 잘 넘길 수 있었다.

유진 씨는 학창 시절 내내 귀밑 5㎝ 머리를 고수했다. 염색도, 긴 머리도 안 된다는 학칙(학교 규칙) 탓이다. 선생님들에게 항의도 해 봤지만 “머리에 신경 쓰다 공부는 언제 할래”라는 꾸중만 들었다.

유진 씨는 성적이 상위권이었지만, 종종 넘을 수 없는 벽을 실감했다. 1등을 놓치지 않는 친구 민지가 서울 목동의 한 오피스텔에서 1대1 고액 과외를 받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납득도 됐다. 유진 씨도 부모님을 졸라 동네 학원에 다녀봤는데 별다른 건 없었다. P2P(개인대 개인) 사이트를 뒤져 ‘둠강(어둠의 강의)’ 파일을 다운받아 공부했다. 인터넷 강의만이 유진 씨의 사교육 통로였다.

유진 씨에게 위안을 안길 공간은 ‘싸이월드(미니홈피)’뿐이었다. 학교를 마 치면 싸이월드를 확인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설정해 둔 배경음악 ‘프리스타일-Y’를 듣는다. 발 빠른 친구들이 그새 일촌평을 남겼다. 배경음악을 흥얼거리며 친구 싸이월드에 찾아가 일촌평을 ‘반사’해줬다.

유진 씨가 대학 입학을 앞둔 2010년, ‘카카오톡’이 생겼다. 대학 새내기 때만 해도 친구들과의 소통 창구 였던 싸이월드나 ‘네이트온’은 반년도 안 된 2학기가 되기 전 멸종위기에 몰렸다.

이젠 글자 수를 꾹꾹 눌러 문자를 보낼 필요도 없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나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같이 대단한 사람들만 갖는 줄 알았던 스마트폰을 이젠 모든 사람이 쥐고 다닌다. 요 기특한 것 없이 무슨 재미로 살았는지 유진 씨는 아득하다.

2011년 대학 입학 당시만 해도 새로 만난 친구들은 나이와 사는 동네는 물론 무슨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는지를 묻는 게 일상다반사였다. 정시로 합격한 친구들은 자기들은 공부로만 대학에 왔다며 으스댔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으로 들어온 친구는 오랫동안 그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2012년 국가장학금 제도가 만들어졌다. 1년에 800만 원씩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 민망했던 유진 씨는 다행스러웠다. 새내기 때 ‘반값 등록금’ 시위에 나간 보람이 있었다.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부모님 소득과 재산으로 장학금 액수가 정해지는 탓에 집안 형편이 드러나는 일도 빈번했다. “넌 장학금 얼마 받았니”라고 묻는 친구들이 “너희 집은 얼마만큼 사니” 하고 캐는 것 같았다.

2014년 가을. 벌써 졸업학기가 됐다. 졸업요건을 모두 채워 언제 졸업해도 이상할 리 없는 유진 씨는 졸업할지 말지 한참 고민했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졸업예정자를 선호한다고 하니 ‘졸업유예’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유진 씨가 다니는 학교는 졸업을 유예하기 위해선 일부 학점을 수강해야 하고, 등록금도 일부 내야 한다. 유진 씨는 그 돈이 아까워 결국 졸업을 택했다.

졸업 후 공백이 길어지고 있다. 초조한 마음에 인턴을 지원했다. 인턴일 뿐인데 경쟁률이 치열하다. 서류 탈락에 면접 탈락까지 숱한 광탈을 거친 후에야 겨우 얻은 인턴 자리지만, 받는 돈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쳐 밥값과 교통비를 제외하면 남는 게 없다. 그래도 졸업 후 공백을 메울 수 있고, 자기소개서에 한 줄이라도 쓸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닌다.

2016년 봄. 취업준비 기간이 2년 넘어간다. 졸업 전 따뒀던 토익 등 각종 스펙이 만료되니 마음이 급해졌다. 처음엔 가고 싶은 회사와 원하는 직군을 골라 지원했지만, 점점 회사와 직군의 폭이 넓어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구인·구직 사이트를 훑어보고 지원할 회사의 정보를 찾아본다.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용돈 벌이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다녀온다. 필수는 아니지만 있으면 도움이 될 만한 자격증 공부를 하다 보면 어느새 한밤중이다. 자리에 누워 유재석-이적이 부른 ‘말하는 대로’를 듣는다.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이 터널을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벗어날 날이 오긴 할까 상상한다. 금세 베갯잇이 젖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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