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명나라의 탐관 유근(劉瑾)

입력 2020-11-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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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졌지만, 천하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다

유근(劉瑾; 1451-1510)은 명나라 정덕제(正德帝) 무종(武宗) 때의 환관이다. 그는 섬서성(陝西省)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궁중 태감에게 맡겨져 자랐다. 그는 장성하면서 점점 지위가 높아졌고, 효종 때 태감으로 올라 태자를 모시게 되었다. 1505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태자가 제위를 이으니 그가 곧 무종이었다. 유근은 당시 10여 세에 불과한 이 어린 황제를 모시면서 국정을 제 마음대로 농단하기 시작하였다.

환관의 세상…‘팔호’의 우두머리

이 무렵 유근을 비롯하여 마영성(馬永成), 고봉(高鳳) 등 일곱 명의 태감은 무종의 총애를 받아 ‘팔호(八虎)’라고 불렸다. 그리고 유근은 이 ‘팔호’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우두머리였다. 이들은 경성(京城)의 정예 수비대까지 한손에 장악하면서 전권(專權)을 휘둘렀다. 반면 조정의 다른 대신들은 조정 업무에서 모두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러자 대신들은 잇달아 간언을 올렸고, 마침내 무종도 마음이 움직여 유근을 멀리 강남으로 유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대신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기회에 화근덩어리인 유근을 처형시켜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모든 대신들이 다음 날 함께 모여 황제에게 유근을 죽이라고 간언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서 있는 황제’와 ‘앉아 있는 황제’

하지만 이부상서였던 초방(焦芳)이 밤에 유근을 찾아가 그 계획을 폭로하였다. 크게 놀란 유근은 다른 일곱 태감들과 함께 황제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였다. 아둔하고 마음이 여렸던 무종은 유근이 이제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다했던 것을 생각하여 그들을 사면하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사례감(司禮監) 직책을 주었다.

그런데 이 사례감이라는 벼슬자리는 매우 중요한 내궁 관서였다. 명나라 때 백관이 황제에게 상서를 하게 되면 먼저 내각에 보내져 내각 대신들이 의견 처리를 한 다음 황제에게 올려졌다. 그 뒤 황제가 빨간색의 붓으로 재가하는데, 명나라 황제들은 거의 대부분 무능하고 게을렀다. 그래서 대부분의 황제들은 정무가 귀찮아 사례감에게 대필하도록 해 사례감은 자기 마음껏 국정을 농단할 수 있었다.

게다가 사례감은 황제의 뜻을 조정 백관들에게 하달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에 그가 황제 대신 대필을 하고 이를 내각으로 하여금 기초하게 하거나 혹은 관련된 대신들에게 구두로 황제의 뜻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제도는 환관들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황제의 뜻을 왜곡시킬 수 있었다. 사례감의 주관(主管)이었던 유근의 전횡과 발호는 바로 이 제도에 힘입은 바 컸다.

아니나 다를까. 유근은 전권을 손에 넣자 자신을 반대하던 대신들을 모조리 숙청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유근을 ‘서 있는 황제(立皇帝)’라고 불렀고, 반면 황제 무종은 ‘앉아 있는 황제(坐皇帝)’라 하였다. 유근은 사냥매로 토끼 사냥을 하는 등 놀기 좋아하는 무종으로 하여금 공놀이나 말 타기 그리고 매사냥에 심취하게 만들고, 일부러 가장 놀이에 흥이 겨워질 때를 기다려 정사를 청하였다. 그러면 무종은 크게 짜증을 내면서 “왜 모든 일마다 나를 찾느냐? 너희들은 놀고만 지내느냐?”라고 말했다. 유근은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갔으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명나라 4대 암군(暗君) 중 하나인 정덕제(正德帝) 무종(武宗·왼쪽) 때의 환관으로 전권을 장악해 국정을 농단하고 재물을 취한 유근(劉瑾·오른쪽). 사진출처/위키·바이두백과

국정농단 ‘당동벌이’로 이어져

그렇게 하여 국정은 모조리 그의 수중에 넘어왔다. 각지의 관리들이 서울로 올라오게 되면 모두 반드시 그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다. 이름하여 ‘접견의 예(禮)’였다. 뇌물은 바쳤다 하면 백은 천 냥이었고, 때로는 오천 냥에 이르기도 했다. 관리들이 돈이 부족하여 서울 부호에게 빌려서 뇌물을 바친다고 해서 ‘경채(京債)’라고 칭해지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유근은 특무 비밀조직인 내행장(內行場)을 설치하여 나라의 모든 관리들과 백성들을 철저하고 내밀하게 감시, 탄압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전권을 행사하였다. 국정은 온통 혼동에 빠졌고, 모두들 자기 목숨과 자리를 지키기 위해 당파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이 무렵 “자기와 입장과 의견이 같은 무리는 편들고, 자기편이 아니면 공격하다”는 ‘당동벌이(黨同伐異)’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유근이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국정을 주무른 국정농단은 조정의 극심한 혼란을 초래하였다. 천하의 모든 뇌물을 독점하고자 하는 그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조정을 크게 동요시키고 끝내 파탄을 초래하였다. 관리들이 그에게 엄청난 뇌물을 바치려면 백성들을 혹독하게 착취해야 했기 때문에 궁지에 몰린 백성들은 결국 무리를 지어 전국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3357차례 칼질 ‘능지처참’ 당해

1510년, 무능하기 짝이 없던 ‘암군(暗君)’ 무종의 귀에도 마침내 유근의 죄상이 들리게 되었다. 크게 놀란 무종이 직접 유근의 집을 수색하니 놀랍게도 가짜 옥새(玉璽)와 옥대(玉帶)까지 나왔다. 심지어 유근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던 부채 속에서는 두 자루의 비수가 나왔다. 무종은 대노했다. 그리고 당장 그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는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능지처참’이란 사형당하는 사람의 육체를 예리한 칼로 수없이 도려내 천천히 무수한 고통을 당하면서 죽도록 하는 극형이다. 특히 유근에게 내려졌던 능지처참은 무려 3357차례 칼로 온몸을 도려내는 극형 중의 극형이었다. 처음에 가슴부터 10차례 칼을 대는 ‘10도(刀)’부터 시작되었고, 그가 혼절할 것을 대비해 그가 깨어나면 다시 칼을 댔다. 이렇게 하여 이틀째 되던 날 그는 숨졌다. 그가 숨진 후에도 극형은 계속 이어져 3357차례 칼질을 했다.

WSJ, 20세기 세계 부호 50인에

2001년 월스트리트저널은 근현대 100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50인을 선정했는데, 유근이 그중에 포함되었다. 뇌물로 이룬 유근의 재산은 무려 황금 1205만 냥과 백은 2억5000만 냥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명나라 조정의 국고 수입의 열 배도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하지만 유근의 엄청났던 재산도 그의 비참한 최후를 결코 막을 수 없었다. 아니 그 엄청난 재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는 참담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많은 재산을 가졌지만, 천하에서 가장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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