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의 원견명찰(遠見明察)] 시간의 궤적 (3)전주에서

입력 2020-10-2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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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렉트릭 사장

고속도로를 타고 전주에 도착하면 ‘호남제일문’이라고 쓰인 현판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일주문 위에서 방문객을 반겨주고 있다. 내 고향 전주는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는 자부심과 호남에서 제일가는 도읍이라는 긍지가 흘러넘치는 곳이다.

나에게 전주는 어릴 적 ‘명심보감’을 배우러 다니던 서당의 기억에서부터 낚시를 좋아하시던 아버지를 따라 낚시 반 구경 반으로 다니던 운암 저수지(지금의 옥정호)의 추억이 쌓여 있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경기전은 이곳이 조선 왕조의 발상지임을 보여주고 있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전동 성당은 근대화 시기의 종교와 문화 충돌의 흔적을 남겨 두고 있다. 지금은 성공적으로 한옥 마을이 관광상품이 되어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은 도시가 된 전주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나에게 전주는 항상 안타까운 사랑의 대상이었다. 언제나 같이 있고 싶고 그 품에 안기고 싶은 곳, 그래서 더 잘되기를 바라고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은 고향이었다. 문학과 예술 그리고 삶의 가치를 우선하는 지역 문화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곳, 그래서 경제적인 성취보다 사람 됨됨이를 무겁게 생각하는 곳이다. 온 나라가 경제 개발에 매진하고 있던 1970년대에도 번듯한 공장 하나가 없던 도시, 인구수가 일곱 번째로 많다 하여 7대 도시라고 하지만 그에 걸맞게 지역 소득이 높지는 않았다. 그러나 후대들을 위한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교육 도시라고 불리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던 곳이다.

지역의 젊은이를 대상으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는 계기에는 나도 모르게 ‘실사구시’를 강조했다. 고향이 좀 더 잘살게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었고, 후학들이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커나가기를 바랐었다. 이념으로 현실을 지배하지 않고 현실에 뿌리를 내리고 이념이나 가치관을 새로 만들어가는 삶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압축 성장의 경제 시대가 저물고 질적 성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지식 기반형 경제 구조로 변하면서 ‘전주의 힘’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이 오고 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새만금은 새로운 에너지 세계의 중심이 되어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다. 태양광과 해상 풍력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에너지원이 새만금을 중심으로 날아오르기를 준비하고 있다.

전주의 또 다른 가능성은 한류 문화이다. 과거 이 나라의 대표적인 예술 도시, 예향(藝鄕)이었던 전주는 이제 끊임없이 참신하고 가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적 정신을 뛰어넘어 당당하게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세계적인 한류 스타 방탄소년단의 뿌리가 전주인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전주에서 출발하여 전라북도 일대를 아흐레 동안 걸었다. 이곳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순례길’은 관용과 배려의 길이다. 길은 이 지역에 있는 천주교,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 모든 종교의 성지를 거쳐 간다. 전주의 전동 성당에서 시작하는 이 길에서는 천주교의 천호 성지, 나바위 성지와 초남이, 기독교의 금산 교회, 원불교의 금구 교당 그리고 송광사와 금산사를 만날 수 있다.

종교는 다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삶의 터전에서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궤적은 역사를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사람이 그리는 무늬를 보여준다. 한때는 치열했던 생각의 차이도, 종교를 대하던 모습도, 그리고 일상 속 삶의 애환도 ‘순례길’에 스며들어 굽이굽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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