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주년] 규제, 하루 4.3개씩…공정 '안전핀' vs 혁신 '걸림돌'

입력 2020-10-0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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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들 리스크 회피에 역량 소진…합리적 규제, 경쟁력 향상 시각도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로 원격의료, 자율주행 로봇, 드론, 에어택시 등 새로운 산업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낡은 법은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혁신 산업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공유경제 대표주자인 ‘타다’는 ‘타다금지법’ 국회 통과 이후 영업을 멈췄다. 원격의료는 사회적 합의 실패로 수년째 벽에 부딪치고 있다. 우아한형제들(배달의 민족)이 선보인 배달 로봇 ‘딜리드라이브’는 도로교통법과 녹지공원법상 운행할 수 없었지만, 최근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승인을 받아 한시적으로 보도와 횡단보도에서 운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에어택시도 관련 입법이 더딘 상황이다. (그래픽=손미경 기자 sssmk@)
“어찌 됐든 저는 졌고 뭘 해도 안 됐다. 제가 사회를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탓이 크다.”

‘타다’라는 4차산업 혁명 시대에 걸맞은 혁신 서비스를 이끈 이재웅 전 쏘카 대표이사가 퇴진하며 남긴 말은 기업과 정치권의 ‘속도의 충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14년 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진단했듯 기업은 시속 100마일로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정부나 정치권은 25마일로 달리고 있다. 타다와 정부·정치가 달리는 속도가 현저하게 차이가 나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타다는 운행을 멈추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일컫는 기술 혁신과 이에 수반한 사회·경제 구조의 네 번째 대변혁이 예고돼 있다. 변화에 민감한 기업들은 이미 바뀌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뼈를 깎는 혁신에 나섰다.

그러나 기업이 주축이 돼 새로운 선진경제를 건설하기 위해선 선진사회가 필요하다. 선진사회는 정부와 정치권이 만드는 주요 제도들이 뒷받침하는데 이 제도가 뒤처져 있다면 경제 발전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다.

1995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라는 메시지가 25년이 지난 2020년에도 계속해서 회자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하루 4.3개 규제 법안…미래보단 규제 방어 급급한 기업들

최근 ‘공정경제’를 외치며 정부와 정치권은 각종 규제를 쏟아내고 있다.

국무조정실 산하 규제개혁위원회의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5월 말 출범한 21대 국회에서 쏟아낸 규제 법안은 9월 11일 기준 456개이다. 하루 평균 4.3개의 규제 법안이 발의된 꼴이다. 신설·강화되는 정부의 입법 규제까지 더하면 이 수치는 더욱 높아진다.

이 중에서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공정경제 3법’이다. 공정경제 3법은 △다중대표소송 도입·감사위원 분리선임·감사 선임 시 주주총회 결의요건 완화 등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 △전속고발제 폐지, 법 위반 과징금 2배 상향 등이 포함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자산이 5조 원이 넘는 비(非) 지주 금융그룹을 감독하기 위한 ‘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이다.

강호갑 중견기업연합회 회장은 “우리나라는 이미 ‘입법규제 천국’인데, 상법·공정거래법 개정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 증가와 국제경쟁력 약화는 국가 경제 발전의 발목잡기를 넘어 사회 전반의 가치체계 정상화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며 “각종 규제가 기업들에 또 다른 살인적 바이러스로 작용해 백약이 무효한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고 쓴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기업들 역시 규제 혁신 대신 공정경제 입법을 우선시하면서 생존과 미래를 위해 투입해야 할 자본이 대신 경영권 방어와 지배구조 개선에 투입되면서 성장 여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그래픽=손미경 기자 sssmk@)

한 경제단체 관계자 역시 “정치권에서 쏟아내는 규제 입법을 보면서 현재 위기를 헤쳐나가고 미래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 기업들이 오히려 경영권 방어나 규제를 피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치고 있다”며 “과도한 규제 대신 합리적인 규제를 만들어 달라는 게 기업의 입장”이라고 토로했다.

혁신산업의 발전도 가로막는 규제도 기업에는 생존을 어렵게 하는 요소다. 타다는 3월 일명 ‘타다 금지법’으로 불리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며 좌초됐다. 기존 산업과의 이해관계로 인해서 혁신산업의 앞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미래를 이렇게 막아버리는 선례를 남기면 앞으로 또 다른 미래 역시 정치적 고려로 막힐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입법뿐만 아니라 정부·정치권의 소극적 대응도 혁신산업의 발생을 지연시키는 장벽이다. 새로운 산업에 적합한 규제 인프라가 없어서 기업은 신사업의 불법 여부를 판단하기 어렵고 복수 부처 법령이 얽혀 있는 경우 중복되는 규제로 인해 사업을 진행하기도 어려운 경우도 태반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에어택시나 자율주행 배달 로봇 등 이미 혁신기술은 준비돼 있다”며 “상용화되는 시점은 입법과 규제 해소가 이뤄지면 빠르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신사업 길은 열되 공정경제도 지속 추구해야

일각에선 혁신산업을 위한 규제 해소는 필요하지만, 기업들의 장기적인 경쟁력 향상을 위해 오히려 정치권이 공정경제를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공정경제의 정착이 오히려 경영의 투명성 제고에 도움이 되고 국제 표준에 걸맞은 기업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는 시각이다.

경제개혁연구소 역시 “공정경제정책의 이행을 완료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정한 경제생태계 조성을 위해 필요한 추가적인 정책과제를 발굴해 법제화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경제개혁리포트를 통해 주장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도 최근 한국사회의 개혁과 입법과제를 통해 “1970년대 이래 효율적인 경제성장과 수출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벌 대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온 국가정책의 결과, 계열사 부당지원과 복잡한 순환출자를 통해 문어발식으로 계열사를 확장해 재벌 기업집단으로의 경제력 집중이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경제력 집중과 양극화 등 구조적 원인으로 경기의 장기침체 현상이 뚜렷해지는 시기에 재벌개혁 등 경제민주화 정책이 힘 있게 추진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해외 주요국에서도 대기업이 무분별하게 사업을 확장할 수 없도록 제도화한 만큼 국내에서도 재벌기업을 대상으로 이러한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국의 경우 일정 비율 이상의 자회사 주식을 보유하면 자회사 지분 의무보유 비율에서 부족한 주식을 의무적으로 매수하도록 ‘의무공개매수제도’를 도입했으며, 이스라엘은 손자회사 지배를 원칙적 금지해 지주회사의 문어발식 계열사 확대를 막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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