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속으로] 여성이사 의무화 시대

입력 2020-08-26 14:56수정 2020-08-26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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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 12일. 한국 여성계와 기업에는 기념비적인 날이다. 국내 기업 이사회에서도 여성 이사의 선임 의무화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지난 1월 국회는 자본시장법상 ‘이사의 성별에 관한 특례’를 통해 “자산총액(금융업은 자본총액 또는 자본금 중 큰 금액) 2조 원 이상인 주권상장기업은 이사회의 이사 전원을 특정 성(性)의 이사로 구성하지 않도록” 규정했다. 당초 제안됐던 여성이사 의무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는 자율규정을, 의무화를 “하여야 한다”는 의무규정으로 신설한 것이다. 이로써 여성이 기업의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적극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제도적 방안이 마련됐다.

그동안 한국의 양성평등 수준은 어땠을까? World Economic Forum의 ‘Global Gender Gap Report 2020’을 보면, 한국은 전체 153개국 중 108위이며, ‘경제 참여와 기회(Economic Participation and Opportunity)’면에서는 127위에 불과하다. 아시아에서는 같은 유교 문화권인 106위 중국, 121위인 일본과 비슷하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면, 이번 우리나라 자본시장법 개정은 커다란 진보의 서막임은 분명하다. 새로운 법 규정의 시행만으로도 세상이 더 좋아질 것 같은 희망이 생긴다.

하지만 조금 막연하다. 한국은 왜 여성이사를 의무화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을까? 각국 기업들의 이사회 내 여성임원 비율을 보면 알 수 있다. 세계적인 흐름 대비 부실한 한국의 현황 때문이다. 그림을 보면 한국의 기업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이 최하위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크레디트스위스 The CS Gender 3000 in 2019: The changing face of companies (주요국 여성이사 비율 현황)

수치의 ‘유형별 분포’를 조망해 보며 좀 더 살펴보면 더욱 극명하다. 다국적 기업들의 이사회 내 여성이사 평균이 21%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위로 1) 프랑스와 노르웨이가 각각 44%, 41%로 압도적인 최상위 그룹에 위치하고 2) 독일 32%, 영국 30%, 네덜란드 26%, 스페인 24%, 미국 24% 등 대부분의 유럽권과 영미권 국가들이 20~30%의 비중으로 그 다음 그룹에 분포하고 있다. 글로벌 평균 아래에는 아시아 국가들이 위치하는데, 3) 18%의 싱가포르와 15%의 인도를 선두로 하여 동아시아에 이르면서 일본 6%, 한국 3% 등이 ‘한 자리 수’를 보이고 있다.

즉, 한국의 경우에는 기업 이사회 내에 남성이 97%라는 뜻이다. 아직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고 하지만 조금 심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단지 ‘문화가 다르다’라고 단정하거나 ‘선진국이라서’라고 부러워만 하고 말 것인가? 결과의 제도적인 맥락을 알아보기 위해 각 국가의 ‘법 내용과 상벌 유형’을 연결해 보자.

글로벌 여성이사 제도의 세계적인 공통점은 인원이든 비중이든 모두 의무 ‘할당제’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여성이사의 비중이 높은 나라들은 ‘전체 기업’을 대상으로, 초기부터 할당 ‘비중이 크거나’ 시기에 따라 이를 ‘단계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나아가 ‘이사회 규모’에 따라 의무화 비중을 달리하는 세부항목까지 있다.

이사회 내 여성임원 비중 세계 1위인 프랑스의 경우 20%에서 40%까지 단계적 확대, 2위인 노르웨이의 경우 최소 1인 이상이지만 이사회 규모에 따라 40%까지로 규정한 게 그 예이다. 이를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보면, 제도의 내용과 국가별 여성이사 비중 사이에 매우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비중 수치가 낮은 아시아 국가의 경우 의무화 비중을 ‘1인 이상’이란 규정으로 한정하고 있다. 한국의 자본시장법의 경우에는, 1인 이상일 뿐 아니라 적용 대상까지 자산 2조 원 이상 기업으로 한정하고 있다.

▲국가별 여성이사 비중/제도/상벌 유형 및 특징 (크레디트스위스, 자본시장연구원,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대신지배구조연구소 정리)
국가별 수치는 상벌 유형과도 직결되는 특징을 보인다. 즉, 국가별 여성이사 순위가 ‘제재 부과형’, ‘설명 및 인센티브 제공형’, ‘자율공시 유도형’ 등 상벌의 강도와 거의 일치한다. 예컨대 세계 1위 프랑스는 위반 시 임원 선임의 효력이 없거나 보수 지급이 안 되고, 2위 노르웨이는 경고, 벌금을 넘어 상장폐지, 회사 해산의 조치까지도 가능하다. 중간 순위의 스페인은 인센티브형이다. 제도를 준수하는 기업에게 정부 관련 계약 시 혜택을 준다.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미이행 시 아무런 패널티가 없으며, 한국도 그렇다. 일본의 경우에는 설명의무가 있는 정도이다.

한국은 민간영역의 양성평등을 위해 이제 첫발을 내딛었다. 정책 시행 초기에 첫걸음부터 보폭을 크게 갈 수는 없다. 무엇보다 당장 내년 주총부터 여성 이사회 인력 풀(Pool) 시급히 확보해야 하는 기업의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난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의 선례에서 나타나듯이 더욱 실효성 있는 제도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즉, 적용 대상 기업의 범위, 의무화 비중, 이사회 규모에 따른 변화 등 단계적인 로드맵이 필요하다. 여기에 상벌 관련 규정까지 조정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사회 내의 여성뿐 아니라 기업의 ‘여성 관리직 비율’도 연계하고, 책임투자 차원에서 ‘공적 연기금’까지 활용하면 효과는 더욱 클 것이다. 이웃 나라 일본은 ‘여성활약추진법’으로 여성 할당 의무화 범위를 확대하고, 공적 연기금이 ‘Empowering Women Index’를 둬 여성친화기업에 투자를 장려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히 남녀평등 차원을 넘어, 여성이 이사진에 포함된 기업들이 경영 성과와 문화적 차원에서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더 우수하고 지속 가능하다는 걸 광범위하게 입증하고 있다.

인류의 절반은 여성이다. 여성의 정치적 자유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얻을 수 있었지만, 최근 사회적 자유의 영역으로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여성이사 의무화 제도의 실천으로 구체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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