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났다] 문경란 "故 최숙현 사망, 대한체육회 '직무유기' 탓…정부의 개혁 의지 필요"

입력 2020-07-30 18:30수정 2020-07-3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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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3종 선수 사망사건 공대위 상임공동대표 인터뷰

▲문경란 공대위 상임공동대표(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는 정부의 강력한 개혁 의지 만이 스포츠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지금처럼 조사하게 되면 결과에 관해 국민이 얼마나 납득하고 수긍할지 의문입니다. 젊은 선수들의 인권 의식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정부가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고 유지한다면 제2, 제3의 최숙현 선수가 안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기자가 29일 서울의 한 카페에서 만난 문경란 '철인 3종 선수 사망사건 공대위' 상임공동대표(61·여·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의 말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체육계에서 연이어 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현실 때문이다. 구름이 자욱한 하늘에서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마치 그의 착잡한 심경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다.

故 최숙현 선수의 사망을 두고 대한체육회의 '직무유기'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 그는 "선수의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체육계에) 보편화됐다"며 "(이같은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정부의 강력한 개혁 의지를 통해 법과 정책, 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경란 스포츠인권연구소 대표는 현재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철인 3종 선수 사망사건 공대위'의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철인 3종 선수 사망사건 공대위'는 20일 故 최숙현 선수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스포츠계 폭력 사태 재발을 막기 위해 발족했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문화연대 등 41개 시민단체가 참가한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문화체육관광부 특별조사단과 국회 청문회 등 정부와 국회의 진상조사 활동을 감시하고 한국 스포츠계의 구조 개혁을 요구할 예정이다.

한편 국회는 최숙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는 30일 전체회의를 열어 체육인 인권 보호 강화를 골자로 하는 '故 최숙현 법'(국민체육진흥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개정안은 체육계 폭력 및 비리 근절을 위해 선수 인권침해 해결, 가해자 처벌 등과 관련 제도를 개선하고 주무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의 관리·감독 의무도 강화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정부의 강력한 개혁 의지 만이 스포츠계 변화시킬 수 있어"

문경란 상임공동대표는 새로운 법안 제정도 중요하지만 스포츠를 개혁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강력히 천명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적 지상주의를 바꾸기 위해서는 법과 정책, 그리고 제도 등을 많이 바꿔야 한다"며 "정부가 강력히 (개혁) 의지를 표명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문 대표는 정부의 개혁 의지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작년 스포츠혁신위원회에서 7차례의 권고안을 냈을 때 체육계에서 거세게 저항했고, 이로 인해 정부 부처의 개혁 의지가 흔들렸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는 "정부가 그런 저항에 흔들리지 않고 개혁 의지를 분명하고 강력하게 표명하면서 밀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사실 그는 올해 1월 활동을 마친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혁신위원회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문체부는 지난해 2월 체육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심석희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사건 등을 계기로 체육 분야 구조 혁신을 위해 스포츠혁신위원회를 발족한 바 있다.

문 대표가 위원장을 맡았던 당시 스포츠혁신위는 총 7개의 권고안을 내놨다. 권고안에는 △스포츠 성폭력 피해자 보호 지원체계 확립(1차) △학교 스포츠 정상화(2차) △스포츠 인권 증진 및 참여 확대(3차) △'스포츠 기본법' 제정(4차) △스포츠클럽 활성화(5차) △엘리트 스포츠시스템 개선(6차) △체육 단체 선진화를 위한 구조개편(7차) 등의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7개의 권고안은 정작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문 대표는 "당시 혁신위에서 권고안을 냈을 때 체육계에서 큰 저항을 했고 (그것이 권고안 이행에) 걸림돌이 됐다"며 "(그로 인해) 문체부나 교육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의 개혁 의지도 많이 흔들렸다"고 소회를 밝혔다.

▲문 대표는 견고한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개혁하기 위해선 '모두를 위한 스포츠(Sports for all)'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고이란 기자 photoeran@)

◇"엘리트 체육 개혁, '모두를 위한 스포츠' 패러다임 전환 필요"

문 대표는 개별 입법을 통해 파편적으로 개선이 되기보다도 스포츠 시스템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모두를 위한 스포츠(Sports for all)'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모두를 위한 스포츠' 패러다임은 기존의 엘리트 스포츠 위주의 독점적 구조에서 벗어나 '엘리트 스포츠, 학교 스포츠, 생활스포츠가 균형적으로 발전하고 공존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의 스포츠 참여 및 향유권을 보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엘리트 체육 육성과 국위선양이 목적인 스포츠가 아니라 보장받아야 할 국민의 권리로 인정해야만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봤다.

문 대표는 이를 위해 '스포츠 기본법'이 우선으로 제정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스포츠 기본법'은 작년 1월부터 1년 동안 활동했던 스포츠혁신위의 4차 권고안에 포함된 내용으로, '스포츠는 모든 사람의 기본적 권리'라고 명시하는 법안이다. 스포츠를 국위선양의 도구로 간주하고 폭력을 용인해왔던 기존의 시스템을 깨뜨리기 위해선 스포츠 기본법을 통해 스포츠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스포츠 기본법에 대해 "지난 국회에서 논의해야 했는데 다루지 못했다"며 "이 사안은 이념적인 것도 아니고 여야가 함께 할 수 있다"고 제정 논의를 촉구했다.

▲문 대표는 대한체육회가 이른바 '직무유기'를 했다고 지적했다. 사진은 故 최숙현 선수의 유골함. (연합뉴스)

◇"대한체육회의 '직무유기'가 故 최숙현 선수의 목숨을 앗아갔다"

故 최숙현 선수는 지난달 26일, 22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최숙현 선수는 수영과 사이클, 마라톤을 합친 종목, 트라이애슬론에서 고등학생이던 2015년에 이미 태극마크를 달았을 정도로 유망주였다. 하지만 전 소속팀인 경주시청에서 최숙현 선수를 상대로 상습적인 폭행과 괴롭힘이 있었고, 한계에 부딫힌 최 선수는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최숙현 선수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을까. 문 대표는 대한체육회가 이른바 '직무유기'를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수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체육계에) 보편화됐다"며 "대한체육회 산하의 '클린스포츠센터', '스포츠인권센터'가 (최숙현 선수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대한체육회 산하 부서인 클린스포츠센터에 속한 스포츠인권센터는 스포츠계 폭력 사건의 조속한 처리를 위해 2005년 7월 선수보호위원회 및 선수고충처리센터로 처음 출발했다. 스포츠인권센터는 상담사 5명, 일반 직원 2명, 조사관 3명을 배치해 스포츠 폭력-성폭력에 대한 신고, 상담, 교육 등 서비스를 지원해왔다.

하지만 스포츠인권센터는 그동안 제대로 작동되지 못했다. 최숙현 선수 역시 올해 초 부산시체육회로 팀을 옮긴 뒤 스포츠인권센터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스포츠인권센터의 무용론은 이미 지난해부터 제기된 바 있다. 지난해 1월 심석희 쇼트트랙 선수의 '미투' 폭로 이후 스포츠인권센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이 지적됐고, 이에 대한체육회에서는 문체부 산하 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을 바탕으로 '스포츠 윤리센터' 설립 등의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스포츠인권센터는 별다른 변화 없이 운영돼왔고, 결과적으로 최숙현 선수를 죽음에 이끌었다.

문 대표는 8월 5일 출범을 앞둔 문체부 산하의 스포츠 윤리센터 역시 기존의 인권센터와 차별성이 없다고 봤다. 특히 '독립성'의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독립성은 스포츠 윤리센터의 생명과 같은 것"이라며 "권력의 영향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문 대표는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를 징계하는 과정에서 어떤 체육 단체도 관여할 수 없어야 한다"며 "스포츠 윤리센터에서 조사 및 징계사항을 문체부 장관에게 바로 보고해서 그 징계사항이 이행될 수 있도록 영향력을 차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한, 19일 대한체육회가 발표한 폭력 지도자 원스트라이크 아웃, 신고 포상제, 합숙훈련 허가제 도입 등 ‘스포츠 폭력 추방을 위한 특별 조치방안’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심석희 미투 이후에도 대한체육회는 비슷한 대책을 특단의 대책이라고 내놨지만,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며 "신고 포상제, 합숙 허가제 등은 기존의 엘리트 스포츠 체계와 성적 지상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인적 카르텔로 인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문화연대 등 41개 시민단체는 20일 故 최숙현 선수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스포츠계 폭력 사태 재발을 막고자 '철인 3종 선수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뉴시스)

◇폭력마저도 용인되는 스포츠계의 '성적 지상주의'가 근본적 원인

계속된 문제 제기에도 스포츠계 폭력이 해결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뭘까. 문 대표는 그 원인을 "폭력마저도 용인되는 성적 지상주의와 승리 지상주의, 그리고 국가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국위선양'이 언급된 국민체육진흥법 1조를 예로 들었다.

“국민체육을 진흥하여 국민의 체력을 증진하고,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여 명랑한 국민 생활을 영위하게 하며, 나아가 체육을 통하여 국위선양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국민체육진흥법 1조)

1962년 제정된 '체육정책의 헌법'인 국민체육진흥법의 첫머리는 체육의 목적이 ‘국위선양’임을 명시하고 있다. 지도자들은 국위선양을 위해 선수들에게 폭력을 가해왔고, 국가 역시 국위선양을 이유로 스포츠 인권을 사각지대에 방치했다. 국민이 메달의 달콤함에 빠져있는 사이, 폭력의 피해자들은 사각지대로 더욱 깊숙이 숨어 들어갔다.

문 대표는 성적 지상주의를 띄고 있는 한국 엘리트 체육을 개혁하기가 쉽지 않다고 봤다. 이어 "엘리트 체육이라는 제도와 문화도 견고하지만,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운영하고 거기서 기득권을 얻는 인적 카르텔도 굉장히 견고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국민 모두가 화합 및 단결, 도전과 전진을 외칠 때, 체육인들은 앞장서서 국가와 민족의 자존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그 노력과 헌신의 정신으로 스포츠는 우리 역사와 함께하였다. (중략) 하지만 스포츠 혁신위원회의 권고안은 체육인들을 잠재적인 범죄 집단으로 전락시키는 편향적인 자세와 체육계의 폐해를 침소봉대하여 수치스러운 적폐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다.'(2019년 6월 18일 대한민국 체육인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 내용)

지난해 6월 18일, 학교 스포츠를 정상화하자는 내용의 2차 권고안이 발표된 직후 '대한민국 체육인' 일동 명의로 발표된 성명서의 내용이다. 혁신위의 2차 권고안에서 언급된 주중 대회 금지, 입시제도 변화 권고에 대해 체육 단체들이 ‘엘리트 죽이기’라고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처럼 엘리트 체육인들은 스포츠혁신위의 권고안이 엘리트 체육의 폐해를 과장해 스포츠의 가치를 폄훼했다고 반발했다.

견고한 엘리트 체육 시스템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을까. 문 대표는 패러다임의 변환이 필요함을 재차 강조했다.

"이제는 메달을 통해 자부심을 느끼는 스포츠가 아니라 안정된 환경 속에서 훈련하고 기량을 겨루는, 인권에 기반을 둔 스포츠로 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숙현 선수가 자신의 생을 던지면서까지 준 경고이자 바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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