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궈메이 창업자, 황광위(黃光裕)

입력 2020-07-22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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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동안 감옥에서 자신의 상업제국을 운용하다

돌아온 “상업의 스승”

2020년 6월 24일, 무려 12년 동안 감옥에 구속되어 있던 중국의 유명한 기업가 황광위(黃光裕·51)가 마침내 감옥에서의 기나긴 동면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다.

황광위는 중국 최대 가전 판매기업인 궈메이(國美)의 창업자로서 2004년에 매년 중국 부호 순위를 발표하는 후룬바이푸(胡潤百富)의 랭킹에서 중국 대륙 부호 1위에 오른 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무려 세 번에 걸쳐 중국 최고의 갑부 자리에 그 이름을 잇달아 올렸다.

그러던 그가 2008년 11월 19일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된 뒤 베이징 감옥에서 자살을 시도하였고, 다행스럽게도 교도관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 2009년 1심 판결에서 그는 불법경영죄, 뇌물공여죄 그리고 불법내부거래죄라는 세 가지 죄목으로 징역 14년과 벌금 6억 위안의 형을 언도받았고, 2010년 2심에서도 1심 판결은 그대로 유지된 채 12년을 감옥에서 구속되어 있었다.

박리다매 “가격의 도살자”

황광위라는 이 신비스러운 인물은 1969년 광둥성의 산터우(汕頭)시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지주 출신이라는 차별을 받아 토지개혁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집안은 완전히 몰락하고 타향으로 이주해야 했다. 너무나도 가난했던 환경에서 황광위와 나머지 3형제는 넝마를 주워 끼니를 이으며 살아야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 더 이상 살 방도가 없던 그는 형과 함께 멀리 내몽골로 떠났고, 그의 사업 역정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87년 베이징에 100㎡의 가게를 얻어 ‘궈메이(國美)’라는 가전 판매점을 열었다. 처음에는 의류를 팔았지만, 그가 선택한 옷들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곧 수입 가전 판매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당시 가전업계의 다른 상인들은 오로지 가격을 올려 이득을 챙기는 데 급급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반대로 철저한 박리다매를 원칙으로 삼았다.

1991년 황광위는 ‘베이징완바오(北京晩報)’ 신문에 “가전을 사려면, 궈메이에 오라!”라는 광고를 싣기 시작하였고, 1주일마다 자신의 가전제품 가격을 알렸다. 당시 국영상점들이 “물건이 영 팔리지 않을 때 비로소 광고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때, 황광위는 이미 한 번에 800위안의 매우 낮은 가격으로 신문 광고지면을 통째로 샀다. 그리고 이 광고는 수많은 고객을 창출해냈고, 나중에는 물건이 없어서 팔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자주 경쟁자들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가격을 내놓아 경쟁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에게는 ‘가격의 도살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상표 경영” 중국 가전소매업 프랜차이즈 모델의 창시자

2년이 채 되기 전에 그는 분점을 여섯 개 냈고, 작고 작았던 그의 가게도 이미 대형 가전상가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는 가전소매업 프랜차이즈 경영을 시작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23세였다.

그는 여러 이름으로 나뉘어 있던 회사 상호를 모두 ‘궈메이’로 통일시키면서 이른바 ‘상표 경영’에 힘을 쏟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업가들이 이 상표 경영을 중시하고 있지만, 황광위는 그 가치를 생각한 시기가 더 빨랐고 또 더 예민했다. 그는 서비스를 비롯하여 기업 이미지, 회사 외양, 직원들의 능력, 시스템 구축 등 ‘상표 경영’을 실현시키기 위한 핵심 요소들을 정비하고 제고시키면서 ‘상표 경영’의 가치를 전방위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렇게 다시 2년이 지나자 그의 가게는 전국에 확대되어 88개 도시에 330개 지점이 생겼다. 그리하여 그가 경영하는 ‘궈메이’는 중국의 프랜차이즈 모델로 되었다. 그는 중국 가전소매업 프랜차이즈 모델의 창시자로 불린다.

그는 사업 분야도 확장하여 1999년 투자회사를 설립하며 기업합병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2005년에는 부동산업에도 진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 그는 후룬바이푸가 발표한 중국 대륙 부호 중 맨 앞에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그것도 3년 연속이었다.

▲중국 본토 최고의 부호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갑작스럽게 부패 사건에 연루돼 인생 정점에서 곧바로 추락, 10년 넘게 옥살이를 하다 지난달 24일 가석방돼 풀려난 전 궈메이(國美) 회장 황광위(黃光裕). 연합뉴스

감옥에서 12년을 동면하다

하지만, 마치 끝을 모르는 듯 승승장구하던 그는 2006년 은행불법대출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된다. 그에게 공금 유용과 뇌물수수 등 은행뿐만 아니라 고위 관리들과 부적절한 연계를 맺고 적지 않은 위법 행위가 있었다고 전해졌다. 시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2008년 궈메이의 주가는 크게 하락하였고, 중국은행 산하기관인 중은국제(中銀國際)는 궈메이에 대한 신용평가 등급을 크게 강등시켰다.

그러자 궈메이의 주가는 4.5홍콩달러에서 순식간에 1.26홍콩달러까지 곤두박질쳤고 이후에도 계속 더 하락하였다. 중은국제는 궈메이에 대한 평가 강등 외에도 “시장은 계속하여 궈메이의 CEO 황광위가 부동산 시장에 대한 개인적 투자로 인하여 엄중한 재무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예측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렇게 균열이 가기 시작한 그의 운명은 마침내 2008년 11월 주가조작 혐의로 체포되고 구속되면서 급속히 급전직하했다. 급기야 그 다음해에는 그가 창업했던 궈메이가 그를 고소하고 그를 상대로 회사에 끼친 손실을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제분석가들은 비록 그가 감옥에서 오랫동안 동면하고 있지만, 그의 방대한 상업제국의 운용은 여전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다고 분석하였다. 2011년 7월에는 아직 수형 생활을 하고 있던 그가 감옥에서 돌연 영국의 퇴역 항모 경매에 나서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항모를 구입하려는 목적이 첨단 상품의 전시를 위한 순수한 경영 방침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그의 ‘궈메이 제국’은 현재 중국 전역의 300여 도시에 지점을 내고 있으며, 20만 개의 취업 기회를 창출하고 있다. 그는 본래 자선사업에도 적극적이어서 이제까지 사회에 내놓은 현금 기부금은 1억 위안이 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상업의 스승’, ‘소매업의 세계 1인자’로도 칭해지고 있는 황광위는 여전히 ‘신비한 인물’ 혹은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12년 동안 감옥에서 동면하고 마침내 세상에 다시 돌아온 그가 과연 향후 또 어떠한 모습으로 무슨 활동을 펼쳐나갈지 모든 사람의 눈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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