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립의 중립 직립] ‘이장폐천(以掌蔽天)’ 몇 시간만 버티자?

입력 2020-07-2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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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부 부장대우

지난달 24일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출사표를 던졌다. 유 본부장은 이날 정부세종청사에서 브리핑을 열고 “오늘 중 주제네바대표부를 통해 WTO 일반이사회 의장 앞으로 입후보 의사를 공식 전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달 16일(현지시간)엔 스위스 제네바 WTO 본부에서 열린 특별 일반이사회의 사무총장 후보자 정견 발표를 하고 위기에 직면한 WTO 체제를 정비하고 비전을 실현하겠단 뜻을 강조하며 총장 선거 레이스를 본격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4년 김철수 상공부 장관과 2012년 박태호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WTO 사무총장에 출마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그동안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 김용 세계은행(WB) 총재, 임기택 국제해사기구(IMO) 사무총장, 고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등 주요 국제기구에 한국인 출신 수장이 나왔으나, WTO 사무총장은 없었다. 유 본부장이 사무총장에 선출되면 한국인 최초이자, WTO 첫 여성 사무총장이라는 기록도 세운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 유 본부장이 WTO 사무총장이 돼 국민에게 낭보를 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장폐천(以掌蔽天)이란 말이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뜻으로, 얕은 수로 잘못을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달 24일 유 본부장이 정부세종청사에서 입후보 브리핑을 하기 하루 전날인 23일 ‘유 본부장이 입후보 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에 산업부에서 ‘확정된 바 없다’는 보도 설명 자료를 내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통상라인 고위 공무원은 ‘아직 확정된 게 없어서 확정된 게 없다고 하는 거다’란 입장을 보이며 보도 설명 자료 배포 의사를 밝혔다. 산업부는 그날(23일) 오후 ‘24일 WTO 사무총장 입후보 관련 브리핑’ 공지를 계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고위 공무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역시 브리핑 공지 계획을 인지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뒤면 유 본부장의 WTO 입후보 공식화 브리핑 공지가 나가는데, 그 몇 시간을 모면하기 위해 그런 정책적 결정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확정된 바 없다’는 보도 설명자료를 배포하려 했던 판단을 해당 고위 공무원이 했는지, 통상교섭본부장이 했는지, 산업부 장관이 했는지, 청와대에서 했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보도 설명 자료는 배포되지 않고 몇 시간 뒤 ‘24일 11시 WTO 사무총장 입후보 관련 브리핑’이 공지됐다.

목민관(공무원)의 경국제민(經國濟民) 지침서라 할 수 있는 ‘목민심서’엔 ‘대중을 통솔하는 길은 위엄과 신용뿐이다. 위엄은 청렴에서, 신용은 충에서 나온다. 충하면 능히 청렴할 수 있으니, 이로써 대중을 따르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신용은 믿음이다. 몇 시간 뒤면 ‘브리핑’을 한다고 공지를 해야 하는데, 처음엔 ‘확정된 바 없다’고 한 뒤 손바닥 뒤집듯 했다면 국민이 정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유학(儒學)에서의 충(忠)은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마음이다. 우리 시대의 목민관들은 어떨까.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았을까. 그들이 치우쳐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국민뿐이다. ri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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