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석의 원견명찰(遠見明察)] 길을 걸으며 - ③ 피스테라

입력 2020-06-1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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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일렉트릭 사장

한반도의 서남쪽 끝 해남에는 땅끝마을이 있다. 30여 년 전 젊었던 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기억이 나지 않는 이유로 이곳에 여행을 다녀왔다. 아마도 아이들의 작은 발로 우리 땅의 끝단을 직접 밟게 하고 싶었던가 보다.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지나 100km를 더 걸으면 대서양 바다를 마주하는 피스테라(Fisterra)라는 곳에 도착한다. 0.00km라는 거리 표지석이 있고 먼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이 자신의 신발과 옷가지를 태워 버리기도 하는 관습이 있는 곳, 피스테라의 우리 말 의미도 땅끝이다. 한반도의 끝이든 순례길의 끝이든 땅끝에 서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회가 생긴다.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기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게 된다. 삶의 철학, 삶의 태도, 그리고 인간관계에서의 부족함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그리고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아쉬움과 미안함에 자다가도 이불을 차야 하는 기억들이 너무 많다. 이와 더불어 국가 정책을 다루면서 가져왔던 생각에 대해서도 미련이 넘친다. 조금 더 유연하게 그리고 폭넓게 생각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음에 안타깝기까지 하다. 그러나 에너지 정책이 실사구시적이어야 된다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태양과 바람뿐만 아니라 석유, 석탄, 천연가스 그리고 원자력도 모두 우리에게 소중한 에너지 원이다.

코로나19 이후 한국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한국형 그린 뉴딜’이 논의되고 있다. 친환경을 의미하는 ‘그린’과 경제 활성화를 의미하는 ‘뉴딜’의 합성어인 ‘그린 뉴딜’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 채택한 정책을 일컫는다. 미국 정부는 1500억 달러의 예산을 투입하여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활성화, 에너지 효율 향상 등의 정책을 통해 500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했다. 비록 트럼프 행정부 이후 관련된 많은 정책이 중단되거나 폐지되었으나 이 정책은 금융위기 극복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과 달리 재생에너지 관련 기술이 취약하고 경쟁국의 거센 추격을 받는 우리의 고민은 ‘그린’과 ‘뉴딜’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다. ‘그린’만을 강조하여 재생에너지 보급 위주의 정책을 펼치면 저가 제품이 시장을 잠식하여 국내 산업이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태양광, 풍력의 경우에 이미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국내에서 태양광, 풍력 발전소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련 기자재 산업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뉴딜’이 되기 위해서는 일자리 창출에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재생에너지의 보급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국내 산업의 기반을 튼튼히 해야 한다. 제품의 품질 기준 상향 조정, 기술 개발 투자 확대 등 많은 정책 수단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국민의 세금인 공적 자금이 국내 산업에 유입되어 기업가 정신을 일깨우고 시장을 움직이게 하여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기를 기대해 본다.

땅끝은 끝이 아니다. 낭떠러지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대한 마침표일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에고를 내려놓고 겸손과 관용을 넘어 사랑으로 세계를 가슴에 품고자 떠나왔던 길이다. 그 길에서 연결의 문을 열고 또 열면서 수많은 마디와 단락을 넘기면서 걸어왔다. 쉽고 넓은 문을 마다하고 어렵고 좁은 문을 지나왔는지 자신 없는 나에게 땅끝은 말을 걸어온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위로도 해주고 ‘자, 이제는 어떻게 할 거지?’라는 질문도 던져 준다. 지나온 시간에 있었던 많은 잘못과 시행착오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문 너머로 가는 디딤돌이 되어 준다. 믿음은 각자의 몫이지만 길의 끝이 새로운 시작임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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