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춘욱의 전쟁을 바꾼 경제 이야기] 2.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이 승리를 거둔 이유는?

입력 2020-05-06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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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으로 의회가 왕권 견제, 국부(國富)를 일구다

19세기 초 유럽 대륙을 제패했던 나폴레옹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7차례나 대(對)프랑스동맹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뒷마당이라 할 수 있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반란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결국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 영국이 프랑스의 앞길을 사사건건 가로 막은 이유는 ‘강대한 적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막 산업혁명을 일으켜 도자기와 면제품을 대량생산 중인데, 정작 팔 곳이 없다면 고스란히 재고로 쌓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산업혁명 후 ‘프랑스 견제’ 동맹 주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영국 해군이었다. 영국에서 포르투갈까지 해상 보급선을 유지하고, 군량과 화약 같은 필수 군수물자 공급에서 지리적으로 더 가까운 프랑스군보다 우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특히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넬슨 제독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완벽하게 쳐부숴, 바다의 패권을 장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은 수적으로 우세한 적을 상대로 예전에 한 번도 시도되지 않은 혁신적인 전술을 사용했는데, 그것은 종대(column) 전술이었다. 역사적으로 범선끼리의 전투 사례를 보면, 배를 일렬로 늘어선 채 배의 옆구리 부분을 서로 마주보며 이뤄지는 횡대(Line) 전술이 일반적이었다. 바람을 동력원으로 삼고 있어 배의 신속한 조작이 쉽지 않았던 데다, 범선 옆면에 수십 문의 대포를 배치해 놓았기에 화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특히 대포가 쉴 새 없이 터지는 전투 중에는 아군에게 명령을 전달할 방법이 없어, 일렬로 줄지어 서 있는 게 실수로 아군을 공격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는 점도 단종진을 채택하게 만든 유력한 이유였다.

▲트라팔가 해전의 상황도. 붉은 배가 영국군, 파란 배는 프랑스군, 노란 배는 스페인군이다. 영국 해군의 2열로 열을 지어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붉은 배 중 앞쪽 선두에 선 배가 바로 넬슨 제독의 기함(HMS Victory)이다.

넬슨 제독의 파격적 전법, 종대 전술

그러나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은 전통적인 전술을 벗어나 파격적인 행동을 취했다. 일렬로 늘어선 채 대포를 장전하고 있는 적의 진형 가운데를 향해 2열 종대로 돌파를 시도했던 것이다.

넬슨이 혁신적인 전술(종대 전술)을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첫째, 당시의 전열함은 100여 문의 대포를 보유한 강대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포만으로 상대를 침몰시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대포는 대단히 강력한 무기였지만, 상대의 얼굴이 육안으로 확인될 수준까지 다가서지 않은 상태에서는 목재로 만들어진 상대의 선체를 부술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넬슨 제독은 신속하게 적에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상대의 대포 공격으로 받을 피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넬슨 제독이 새로운 전술을 들고 나온 둘째 이유는 영국 해군이 대단히 잘 훈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영국 해군은 기본적으로 깃발신호에 능숙했는데, 트라팔가 해전 당시 넬슨 제독은 “잉글랜드는 모두가 자신의 임무를 다할 것을 기대한다(England Expects that Every Man will do his duty)”라는 명 문장을 전체 함대에 전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긴 문장을 신속하게 깃발로 올리는 기함 빅토리(HMS Victory)의 수병도 대단하고, 또 이 깃발을 신속하게 이해하는 각 함선의 장교와 수병도 이미 보통 수준의 숙련을 넘어서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상대의 진형을 향해 뛰어드는 급박한 상황에서도 신속하게 명령을 전달하는 일이 가능했고, 또 상대의 진형을 분단시킨 후 차례대로 적 함선을 격파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넬슨 제독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전투에 참여한 33척 중에 1척이 격침당하고 22척이 나포당하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군도 3238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넬슨 제독이 전투 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할 정도였다. 넬슨 제독이 총탄에 쓰러진 이유는 그가 2열 종대의 선두에 서서 적 진형에 제일 먼저 뛰어드는 용기를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병사들을 강대한 적의 중심부로 뛰어들라고 명령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먼저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 해군 승리 밑바탕엔 ‘경제력’

필자는 런던의 그리니치에 있는 해양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 당시 입었던 제복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가 입은 옷의 어깨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었기 때문인데, 이는 그가 배와 배가 추돌하는 격렬한 전투 와중에 마스트에서 쏜 저격병의 총탄에 쓰러졌음을 시시한다. 넬슨 제독의 최후를 바라보며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 사람이 비단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리는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체 영국 해군은 어떻게 그런 놀라운 숙련 수준을 달성할 수 있었을까?”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 당시 입었던 제복.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 소재 해양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명예혁명 전 국채 금리 10%대

여러 이유가 제기되지만, 가장 큰 요인은 영국의 압도적인 경제력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포 사격 기준으로 영국 해군은 1분에 한 발을 쏠 수 있었던 데 비해 프랑스 해군은 2분에 한 발이 고작이었는데, 이는 영국 해군이 실탄 사격 훈련을 시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배와 대포는 비싼 물건이며, 특히 새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유지하고 보수하는 데 매년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영국은 어떻게 거대한 함대를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을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더글러스 노스 등은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에 주목한다. 명예혁명을 기점으로 영국의 국채 금리가 급격히 하락해 프랑스 등 적대적인 나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명예혁명 이전 영국 국채 금리는 10%를 훌쩍 넘었다. 명예혁명 이전에 금리가 높았던 건 당시 영국 왕실(스튜어드 왕가)이 빈번하게 ‘채무불이행’을 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1671년 영국 국왕 찰스 2세가 채권에 대한 이자와 원금 지급을 정지시킨 일을 들 수 있다. 이로 인해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인수해 자산가들에게 소액으로 판매하던 런던의 금융업자들은 치명상을 입었다. 특히 그의 뒤를 이은 제임스 2세가 벽난로세(hearth tax) 등 수많은 품목에 자의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면서 의회를 비롯한 납세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했고, 결국 시민들은 1688년 명예혁명을 일으켜 제임스 2세를 내쫓았다.

세금 징수 의회 동의, 재산권 보호

영국 의회는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을 새로운 국왕(윌리엄 3세)으로 앉힌 뒤, 그에게서 새로운 세금을 걷을 때 의회의 동의를 얻을 것과 국민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강탈하지 않을 것을 약속 받았다. 그 후 영국 정부는 단 한 차례도 이자와 원금의 지급을 연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국왕이 자의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거나 채권 이자의 지급을 연체할 경우 곧바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이 변화에 금융시장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1690년까지만 해도 10%에 거래되던 영국 국채 금리가 1702년 6%로 떨어졌다. 특히 1755년에는 2.74%를 기록해 어떤 경쟁 국가도 꿈꿀 수 없었던 저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영국군의 전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함대를 건설하는 것은 물론, 실제 화약을 이용해 실전에 가까운 훈련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EAR리서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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