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경영의 신’, 타이완 최고 부자 왕융칭(王永慶)

입력 2020-03-18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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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성패의 관건은 ‘세세’한 곳에 있다

왕융칭(王永慶)은 1917년 타이완 타이베이(臺北)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중국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泉州)에서 정주하고 있었으나 그의 증조부 대에 이르러 엄청난 가뭄과 기근으로 타이완으로 이주하였다.

그의 부친은 차밭을 지으며 가계를 꾸려나갔지만 집안 경제사정은 좋지 못했다. 더구나 그가 9살 되던 해 그의 부친은 병에 걸려 몸져눕게 되어, 그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더 이상 진학을 하지 못하고 15살 되던 해 다른 사람의 차밭 잡부로 일하다가 타이완 남부에 위치한 한 조그만 소도시의 쌀집에서 일했다. 이듬해 집에서 200위안을 빌려 스스로 쌀집을 차렸다. 그러나 장사는 잘되지 않았다.

쌀집에서 시작된 경영능력

그도 그럴 것이 부근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대규모 쌀집이 있었고, 나머지 쌀집들도 모두 단골들이 튼튼했다. 하지만 이때 그의 뛰어난 경영능력이 발휘되었다. 당시 쌀 가공업은 기술이 낙후되어 쌀겨가 섞여 있거나 모래나 돌이 적지 않았지만,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모두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매일같이 쌀을 팔기 전에 쌀을 철저하게 검사해서 쌀겨와 돌들을 골라냈다.

또 그 무렵에는 쌀을 사서 모두 자기 자신이 집으로 가져가는 방식이었다. 젊은 사람이야 큰 문제가 없었지만 늙은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왕융칭은 이 점을 파악하고 판매된 모든 쌀을 집까지 배달해주었다. 배달할 때도 쌀독을 청소해주면서 직접 쌀을 쌀독에 부어줬다. 만약 오래된 쌀이 있으면 먼저 새로 산 쌀을 아래에 붓고 오래된 쌀을 위에 붓는 방식으로 오래된 쌀을 먼저 먹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그리고 사정이 어려운 집은 외상으로 쌀을 주고 월급날에 받았다. 그의 가게는 다른 가게보다 문을 빨리 열고 늦게 닫아 최소한 4시간은 더 문을 열었다. 이렇게 얼마가 지나자 단골이 크게 늘어났고, 하루에 고작 12말도 채 팔지 못했던 가게는 몇 달이 채 안 되어 하루에 100여 말을 팔게 되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자 큰 쌀 정미공장을 열게 되었다.

목재사업 거쳐 플라스틱회사 창업

2차세계대전이 일본의 패망으로 끝난 후 일본 식민지에서 독립한 타이완의 경제는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건축업의 기세가 가장 강성했다. 왕융칭은 예민하게 이 기회를 포착하여 목재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의 계산은 적중하여 이익이 크게 났고 그는 일약 지역에서 유명한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목재산업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특히 시멘트, 방직 그리고 플라스틱 분야의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1954년 과감히 목재사업에서 손을 떼고 다른 사람과 동업하여 30만 달러로 타이완플라스틱공사를 세웠다. 타이완 최초의 플라스틱회사였다.

당시 왕융칭의 친구들과 유명한 화학자는 왕융칭이 플라스틱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투자한다고 조롱하였다. 그러나 사실 왕융칭의 이 행동은 이미 치밀하게 조사하고 연구한 끝에 결정한 것이었다. 그는 플라스틱 분야의 전문가와 기업가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하고 자문했으며, 시장상황에 대해 세밀하게 검토하고 비밀리에 일본에 건너가 현지조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회사를 세운 3년 뒤 처음 100톤을 생산했으나 겨우 20톤만을 파는 데 그쳤다. 동업자조차도 그만두자고 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매각하여 회사의 소유권을 모두 사들였다. 그에게는 그만의 계산이 서 있었다.

▲타이완플라스틱그룹(포모사그룹) 창업자로 세계 화공업계로부터 ‘경영의 신’이라 불리운 왕융칭은 교육 사업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가 생전에 1만 곳 건립을 목표로 시작한 ‘희망 초등학교’는 후손에게 이어져 지금까지 중국 빈곤지역 3300여 곳에 세워졌다.

치밀한 준비와 정확한 판단

당시 일본의 경우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3000톤이었는데, 일본의 인구는 타이완의 10배였다. 그는 타이완에서 지금 플라스틱이 팔리지 않는 이유가 수요가 없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격이 너무 높은 데 있고, 따라서 생산을 더 많이 해서 단가를 높임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다음 해에 그는 다시 플라스틱 가공공장을 세워 남아 있는 플라스틱 원료를 완성품으로 만들어 판매하였다.

가격이 낮춰지자 판로가 자연스럽게 열렸다. 그가 세운 두 회사 모두 큰 이익을 낼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사업은 더욱 번창하였다. 플라스틱 생산량은 초창기 1200톤에서 100만 톤까지 상승하여 그의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플라스틱 생산기업으로 성장하였다. 그의 사업은 석화원료, 플라스틱 가공, 섬유, 방직, 전자재료, 반도체, 자동차, 전기, 기계, 운수, 생물과학, 교육과 의료사업으로 무한 확대되었다. 특히 석화공업 영역은 원유의 수입, 수송, 야련, 가공제조부터 완성유 소매에 이르기까지 플라스틱 전후좌우의 영역을 일체화하여 하나의 완성된 산업네트워크를 창조해냈다.

이렇게 왕융칭은 수십 년에 걸쳐 1조 위안의 거대한 상업제국을 창조해냈고, 타이완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1984년 그의 자산은 45억여 달러에 이르렀고 1년 영업액은 30억 달러였는데, 이는 당시 타이완 국내총생산(GDP)의 5.5%에 해당하였다. 그의 타이완플라스틱그룹(포모사그룹) 기치하의 9개 업체에는 7만여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압박관리와 장려관리 병행

수십 년 동안 세계 화공업계는 줄곧 왕융칭에게 “경영의 신”이라는 존칭을 붙여왔을 만큼 그의 경영방식은 높이 평가받았다. 특히 타이완에서는 그의 경영관리 경험을 가장 실용적인 교과서로 삼았다. 그는 경영관리에서 ‘압박관리’와 ‘장려관리’의 두 가지 관리 방법을 견지하였다.

‘압박관리’란 기업 전체와 모든 근무자들에게 긴박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는 적절한 압박을 받거나, 혹은 주도적으로 도전해나가는 것은 한 개인의 왕성한 생명력을 더욱 체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렇게 직원에 대한 요구는 엄격했지만, 동시에 그는 회사에 기여를 하는 직원에게는 아낌없이 커다란 보너스와 보상을 제공하였다. 그는 언제나 “이윤을 창조하면 직원이 향유한다”는 방식을 적용시켰다. 그의 회사 직원은 모두 자신의 노력이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왕융칭은 “더욱 큰 공헌을 영원히 추구하자”를 기업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그의 직원들은 모두 사력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1+1= 3”의 효과를 낸 것이다.

‘희망 초등학교’ 1만 곳 건립 계획

언젠가 사람들이 그에게 “세세한 일들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기고 큰일에만 전념하시는 것이 어떤지요?”라고 권하였다. 그러자 그는 “나는 큰일에도 관심을 가지지만 세부적인 일에 더 심혈을 기울입니다. 성냥개비 하나는 10원에도 미치지 못하고 집 한 채는 수억 원을 넘습니다. 그러나 그 성냥개비 하나가 집 한 채를 모조리 태울 수 있습니다.” 77년에 걸친 사업 일생에서 그는 변함없이 매주 100시간 이상을 일했다. 세밀한 곳에 특히 강했던 그는 자신이 거느린 세계적 거대기업의 세세한 내용 모두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꿰고 있었다.

2002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2008년 향년 9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평생 결코 사치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단히 근검절약하였다. 그런 중에도 사회자선 사업과 교육 사업에는 아낌이 없었다. 2008년 쓰촨(四川) 대지진 때는 1억 위안(한화로 약 900억 원)을 의연금으로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1만 곳의 ‘희망 초등학교’ 건립 계획을 실천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 후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 계획에 의해 중국 대륙의 빈곤지역에 무려 3300여 개의 학교를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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