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인문학 저술가.
이름은 그 존재를 하나의 표상으로 포박한다. 이름은 존재를 포박하고, 동시에 존재를 해방한다. 이름이 존재를 포박할 때 특정한 진실로 화석화하거나 이데올로기의 강제가 나타난다. 어쩌면 이름은 낙인찍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기 이름이라는 낙인찍기의 운명과 싸우는 게 사람의 일이다. 이름이 욕망과 죽음의 한살이를 수납하는 한에서, 한 철학자에 따르면, 그것은 “고뇌의 종착점”이고, “사물에 남아 있는 마지막 탄식”이다. 진실을 말하자면, 이름은 본질이 아니라 운명에의 주문(呪文)이다. 이름은 자꾸 불러줌으로써 기호와 본성이 하나로 거듭나려는 열망을 품은 주문으로 오롯해진다.
정치는 한 사회가 가진 재화와 힘을 배열하고 나누는 가능한 방식들 중의 하나이다. 이 나눔의 방식이 정의와 공정성을 담보할 때만 정치는 정당성을 얻는다. 정치는 치안을 배열하고, 국가 안위와 관련된 국방과 외교를 떠안으며, 공동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이해 집단 간의 갈등을 상시적으로 관리한다. 정치 참여자들은 정당을 만들어 더 큰 권력을 위한 경쟁에 나선다. 정당이 새 정당을 세우거나 옛것을 해체하고 새 간판을 다는 일은 정당 정치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절차적 행위이다. 당의 정체성을 품고 시대정신을 드러내며, 당의 이념을 과시하는 한에서 당명은 곧 당의 얼굴이다. 당명을 곰곰이 뜯어보면 그 당의 관상학적 운명이 드러난다. 당명을 가질 때 정당은 정치의 생산에 관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는 점에서 당명 짓기는 정치의 시작점이다. 당명이 없는 정당은 태어나지 않은 정당이다. 당의 해체와 함께 당명도 사라진다. 이렇듯 당명은 정당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다.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숱한 정당이 명멸했다. 우리 정당들은 자유, 민주, 공화, 한국, 민중, 국민, 정의, 통일, 평화, 녹색, 진보, 미래, 보수, 참여, 희망, 통합, 혁신 등등을 선호했다. 숱한 정당들이 이 범주에서 복제나 변주를 벗어나지 않은 채 새 당명을 만들어 썼다. 접두사로 ‘열린’이나 ‘더불어’, 혹은 ‘친박’을 붙인 당명은 예외일 테다. 당명은 저마다의 정당이 지향해야 할 궁극의 가치, 이념과 지표를 함축하는 기표(signifiant)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진짜 의미(signifie)는 현재 시점에서 당의 결핍 성분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공동체 안에서의 결핍은 갈망의 정동(affect)으로 오롯하면서 이상화의 요소로 작동한다. 당명이 품은 속뜻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즉 현재는 없고 앞으로 거머쥘 미래 가치에 속한다는 말이다. 시대정신을 담은 당명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지나치니 당명과 당의 정체성이 어긋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당의 객관적 실체(존재적 층위)와 당이 추구하는 이상(당위적 층위)의 차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사태다. 당명에 ‘정의’가 있다고 그 당이 ‘정의’에 부합하는 정당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를테면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을 폭압으로 누른 군부 실세가 세운 정당이 ‘민주정의당’이었다. 법과 질서, 정의의 원칙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피묻은 손으로 권력을 거머쥔 집단이 민주와 정의를 앞세울 때 우리는 이 역설과 아이러니에 아연실색하며 그 위선과 후안무치함에 치를 떨었다.
정치의 계절이 돌아온다. 4·15 총선을 앞두고 정치 집단이 이합집산을 하며 새 정당 간판을 다는 등 움직임이 분주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번 총선을 겨냥해 새로 등록한 정당이 40여 개를 넘었다고 밝혔다. 자유한국당이 새로운보수당과 전진당 등과 만든 신당은 ‘미래통합당’을 새 당명으로 삼았다. ‘미래’와 ‘통합’을 정당 정치의 보람으로 삼겠다는 굳은 의지는 총선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당의 분열과 함께 꺾이고 말 테다. 임시로 봉합된 당의 이질적 요소와 계파적 이해에 따라 헤게모니를 놓고 진흙탕 싸움을 하다가 ‘미래’도 ‘통합’도 다 놓친 채 공중분해할 것이다. 안철수의 신당은 ‘국민의당’이라는 새 이름을 선택했다. 애초 신청한 ‘국민당’을 선관위가 물린 것은 국민새정당, 국민참여신당, 국민희망당, 한국국민당 등에서 ‘국민’을 선점한 탓이다. 이 당명은 아무 감흥도 주지 않는다. 그것은 정교한 기획 없이 급하게 꾸린 이 당에서 기성 정당과 다른 정치 비전이나 정치 신인, 새로운 정치의 병참술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구태의연한 당명에서 기대하는 정치 드라마는 뻔하고 낡은 것의 되풀이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양당 구도에서 ‘국민의당’은 단 몇 석을 건질 가능성조차 희박하다. 안철수의 신당이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면 독립 정당의 유지는 불가능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안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탄핵 사태 때 당의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낸 이는 금태섭과 조응천 두 의원이다. 금 의원은 공수처법 정국에서도 기권을 해서 당과 다른 목소리를 냈다. 금 의원은 제 정치적 소신에 따라 당의 의원들과 다른 행보를 보이며 ‘차이(difference)’를 드러냈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차이를 “비산(飛散)하고, 분산하며, 반짝이면서 사방팔방에 반사되는 움직임”이라고 정리하고, 차이의 현실적 양태에 대해 “범람, 침식, 누설, 미끄러짐, 위치 이동, 옆으로 미끄러짐”이라고 말한다. 금 의원의 태도는 당의 기반을 위협하는 범람이고, 침식이며, 누설로 비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내에 하나의 주장, 하나의 목소리만 허용하는 것, 더 나아가 당 내부에서 발원한 ‘차이’를 균열의 신호라고 판단하고 그 당사자를 배제하는 것은 민주 정당에서 온당한가. 민주당에 금 의원은 그 존재 자체가 껄끄러울 수도 있겠으나 그 불편한 다름을 찍어내는 일은 결과적으로 ‘더불어’라는 숭고한 정신을 훼손하는 것이고, 당의 입맛에 맞지 않는 다른 의견을 잘못된 것으로 낙인찍는 행태는 전체주의의 망령을 부르는 퇴행의 징후일지도 모른다.
한 대학교수가 칼럼에서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민주당을 꼬집어 비판하며 소동이 빚어졌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는 이 칼럼이 ‘진보 코스프레’를 하는 논증이 허술한 볼품없는 주장이라든지, 혹은 집권 여당에 불이익을 주려고 ‘기획된 도발’이라든지 그 판단은 중요하지 않다. 이 칼럼이 나오자 민주당 수뇌부의 짜증과 히스테리, 지성의 빈곤과 함께 적나라하게 드러난 당의 오만과 독선이 문제다. 민주당이 발끈해서 필자와 매체를 싸잡아 고소했다가 여론의 역풍을 맞을 때, 그 당이 내세운 ‘더불어’라는 슬로건은 패거리 내에서 작동하는 편협한 정의라는 뜻으로 전락한다. 민주당이 외부 비판을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지 않고 성마른 분노와 독선으로 반응함으로써 그 당의 폐쇄성과 협량함은 발가벗겨진 듯 노출되었다. ‘더불어’를 당명으로 쓰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건 당의 정체성이 ‘우리끼리만의 더불어’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낸다. 민주당이 내세운 ‘더불어’라는 말은 확정성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지만 결과적으로 모순 형용이자 자기 안의 독선을 위장하는 겉치레 말임을 반증한다. 민주당은 엄혹한 자기반성과 함께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당명에서 ‘더불어’라는 말을 내려놓는 게 염치에 맞는 행위일 테다.